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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를 베푼 사마리아 사람 - 원수를 사랑으로 갚다(누가복음 10:30-37)

일하는 목회자 발행일 : 2022-12-04

강도 만난 유대인을 도와준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설교입니다. 사마리아인은 유대인에게 멸시 천대를 받아왔습니다. 신앙을 지키지 못하고 이방인과 결혼한 혼혈이라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은 원수 같은 관계였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생명을 소중히여겨 강도 당한 유대인을 구원했고, 그가 회복할 때까지 물질적인 도움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사랑이 우리 공동체 안에도 풍성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제목: 원수를 사랑으로 갚다

말씀: 누가복음 10:30-37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도입) “90년대생이 온다라는 책을 쓴 임홍택 씨. 이번에는 그건 부당합니다라는 책으로 4년 만에 돌아왔다. 이 책에서는 90년생과 00년생이 왜 기성세대에게 반항아와 같은 존재가 되었는지. 왜 그들과 우리는 다른지에 대한 분석이 담겨있다. 90년생과 00년생이 사회에서 느끼는 키워드는 부당함이라는 것.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부당한 어떤 사안에 대해 그 정도면 현실적으로 괜찮다며 넘어가 버린 기성세대를 향한 반발이 세대 갈등으로 떠오른 것이란 설명이다.

 

왜 그럴 수밖에 없는가? 무한경쟁시대에서 자격을 갖추고 준비를 했다. 그런데, 부정취업과 같은 일들로 인하여 자신의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것을 보면서 공정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세대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어떤가? 부당한 대우, 불법한 일들을 겪었을 때, 분노가 치밀어오르지 않는가? 나도 그럴 때가 있다.

 

(전환) 오늘 말씀에 보면 부당한 대우를 받아온 사람의 이야기가 나와 있다. “사마리아 사람이다.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에게 개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았다. 군대에 가면 웃자는 식으로 하는 말이 있는데, 우리는 군견보다 계급이 낮다고 말한다. 군견은 최소 부사관 계급으로 시작한다. 개보다도 못한 것이다. 우리는 웃자고 하는 말이지만, 실제로 사마리아인들은 그러한 취급을 받았다. 더럽다고, 순혈이 아니라고, 철저히 배제당하고 따돌림을 당해야 했다. 모욕적인 언사를 들을 때도 있지만 참고 넘어가야 했다. 그것이 바로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약자였기에, 감히 드러낼 수 없었다. 묵묵히 견디고, 당하고, 지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이 사람의 마음이 어떨거 같은가? 스스로에 대한 자격지심과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 분노, 억울함 같은 것이 그 마음에 가득 차있었을 것이다. (예화) 총신대에 들어갈 때 면접을 보는데 면접관이 그러더라. 스님이 등산을 하다가 낙상사고를 당해서 발목을 다쳐 절벽 아래에 떨어져 있다. 그 사람을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일단 신학을 준비하는 사람으로서 이단에 대한 엄청난 적대감이 있었다. 그래서 그 스님에게 하나님 믿을거냐고 물어보고 안 믿으면 그냥 간다고 했다. 그정도로 꽉막힌 사람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무섭다. 그래도 사람 살려놓고 전도를 하든말든 해야지, 그건 잘못된 것 아닌가? 적대감으로 가득차서 생명을 소홀히 여긴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분노하고, 화가 나더라도 생명은 그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 안에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여러분도 마찬가지다. 여러분은 굉장히 소중한 존재다. 왜냐면 여러분 그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와서, 우리의 화 때문에 생명을 밟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러한 실수를 하지 말아야 한다. 한번의 실수 때문에 관계가 틀어지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예화) 중고등부 수련회 때였다. 사춘기를 심하게 앓던 교회 동생이 있었다. 그 아이가, 자기를 제재하고, 귀찮게 하는 나이 50대 지긋한 선생님을 향해 욕설을 하고 버릇 없게 하는 것을 보면서 내 안에 화가 치밀었다. 아무리 그래도, 예의는 지켜야 하지 않는가? 그 동생하고 굉장히 친했다. 그런데, 순간의 화를 참지 못하고 그 친구에게 화를 내고 어깨를 밀치면서 힘으로 제압을 했다. 그 이후로 그 친구와 관계가 완전히 틀어져버렸다. 결국 그 친구는 수련회 이후 교회를 떠났다. 내 책임이었다. 그 이후로 나도 좀 변했던 것 같다.

 

(예화) 사실, 승민이를 대할 때 그 친구를 많이 생각한다. 가끔 대답도 시원찮게 하고 그러면 옛날 성격 같았으면 확 뒤집어버릴까 그런 생각을 할 때도 있다. 그러나, 내 화를 풀고 분노를 표출하는 것보다 소중한 게 있다. 바로 승민이의 영혼이다. 승민이가 더 귀하다. 내 감정을 푸는 것보다, 승민이가 행복하고 승민이가 하나님을 믿고 교회를 다니는 게 더 중요하다. 그래서 꾹꾹 참는다. 언젠가 하나님께서 이 아이를 더욱 사랑스럽게 만들 것이라고 믿으면서 말이다.

 

(말씀) 오늘 사마리아 사람도 그러한 마음으로 강도 당한 사람을 섬겼던 것 같다. 부당한 대우, 멸시와 천대를 받으면서도 생명을 소중히 여겼다. 원수와 같은 사람이었던 유대인을 구원하였다. 레위인도 지나가고 제사장도 지나갔지만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않았다. 그를 도와준 것은 자기가 평소에 무시하고, 경멸하고, 같은 장소에 있는 것만으로도 치를 떨며 침을 뱉었던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이다.

 

(확정) 누가복음 14:27에 보면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나와 있다. 우리에게 십자가가 바로 이러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 1025절에 보면,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냐는 질문에 우리 주님께서 사마리아 사람처럼 행하라고 하셨다. 이것이 바로 우리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정말 그리스도인이고, 그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원수를 사랑으로 갚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사람이고, 성화되고 있는 사람이다. 그 안에 성령이 계시다는 증거이다. 우리는 점점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정말 믿음 있는 사람이 모습이다.

 

(적용) 나는 어떤가? 나는 정말 승민이를 보면서 하나님이 나를 성화시키고 계시다는 것을 느낀다. 좋은 게 좋은거라는 말이 있다. 이 말에 환멸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나도 그러니까. 그러나, 이 말에는 숨겨진 의미가 있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것은 일보다, 목표보다 사람이 귀하다는 것이다. 그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한다.

 

(결론) 조용기 목사님, 대단하신 분! 단일 교회로서 75만 명 등록. 전 세계에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대단한 교회이다. 그분이 한창 그렇게 50, 60만이 되었을 때 장로교에서 이단 시비를 걸었다고 한다. 같은 믿음의 사람으로써 어떻게 그럴수가 있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세상에서 돌을 던지고 세상에서 욕하는 건 이해한다. 왜냐면 세상이니까. 그런데, 같은 편인 교회에서 그것도 믿음의 사람이, 목사님이 그런다고? 너무 큰 상처였다고 한다. 그러나, 기도 중에 하나님께서 그런 마음을 주셨다고 한다.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우리 주님 십자가를 지셨는데, 나는 나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 하나 품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서야겠는가? 그래서 그 모든 것을 품고. 자기의 신학을 돌아보며 자기 재점검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 고난이 자기에게 축복이 되었다고 한다.

 

(결단) 우리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중요하다. 사랑이 있어야 한다. 관계의 고난 속에서 우리는 축복을 누려야 한다. 조용기 목사님처럼. 그러한 은혜가 우리 안에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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