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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7:1-10 주해와 설교, 신학적 적용 3가지

일하는 목회자 발행일 : 2023-03-06

literary context (문학적 컨텍스트)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는 장소 안에 계시며, 제자들에게 계속 말씀하신다.(16:1; 17:1) 그 목적은 제자들이 바리새인들과 같이 되지 않기 위한 spiritual formation에 있다. 그들은 소자(the little ones)를 무시하고, 죄인들의 곤경에 동정하지 않으며, 용서하지 않는다. 누가는 17:1-19절을 믿음의 키워드(issue)로 구성시킨다.

17:1-4 > 용서의 믿음

17:5-6 > 모든 것을 할 수 있음

17:7-10 > 겸손한 하수인

17:11-19 > 대단함

 

# 믿음 위에서 (On Faith) (17:1-19)

1. 제자들의 협력을 위한 가르침(17:1-10)

2. 열 문둥병자 중 감사하는 한 명의 사마리아인(17:11-19)

 

Main Idea

믿음은 거치는 돌(stumbling block)을 극복하고 죄를 지은 자를 용서해준다. 아주 작은 양의 믿음도 놀라운 일을 하고 겸손한 순복 속에서 섬긴다.

 

구조와 문학적 형식 (Structure and Literary Form)

이 구조는 세 가지 다른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은 화(woe)와 대한 심각한 경고로 시작한다. 뒤이어지는 질문과 믿음에 대한 격언(aphorism), 그리고 비유가 나온다. 이 예수님의 가르침의 요소를 구성하는 원리는 어떻게 믿음이 제자들의 행위에서 스스로 행해져야 하는지와 관련되어 있다. 다른 이들을 넘어지게 하는 원인이 되지 말 것과, 계속하여 해를 입히지만 용서를 구하는 자를 용서하라는 명령은 이러한 가르침들을 능히 해낼 수 있도록 그들의 믿음을 더하여 달라는 제자들의 요구와 만나게 된다. 다음 이어지는 비유는 예수를 섬기고 복종하는 것 뒤의 동기에 대해 언급한다.

 

해석 개요(Exegetical Outline)

1. 실족시키는 것에 대한 경고 (17:1-4)

a. 이것은 불가피하다. (17:1a)

b. 실족케 하는 자는 심판을 받을 것이다. (17:1b-2)

c. 죄를 짓는 자는 책망받고 용서받는 것이 필요하다. (17:3-4)

2. 믿음에 대한 가르침 (17:5-6)

a. 믿음에 대한 제자들의 요구(17:5)

b. 아주 작은 믿음도 놀라운 일을 한다.(17:6)

3. 충성심(faithfulness)에 대한 비유(17:7-10)

a. 충성심은 어떤 특별한 보상을 받지 않는다.(17:7-9)

b. 충성심은 기본적인 필요조건(requirement)이다.(17:10)

 

본문 설명(Explanation of the Text)

-17:1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제자들은 유혹이 없는 유토피아로 이동하지 않았다. 세상은 하나님의 뜻에 저항하는 자들로 가득하고, 몇몇은 그들 스스로 제자라 할 것이다. 에베소에서 바울의 작별인사에서, 그는 사나운 늑대들이 양 무리에 들어가고 그들을 쫓아낼 것을 경고했다.(20:29-30)

 

-17:2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이전 비유에서 부자가 당하는 고통의 장면은 작은 자를 실족케 하는 것보다, 차라리 던져지는 것이 낫다는 점을 이해하도록 하는 배경을 제공해준다. 한 제자가 다른 이에게 영향을 준 것은 전적으로 그에게 책임이 있다.(14:13; 고전8:8-10; 요일2:10; 2:14)

이 작은 자는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그 문맥에서는 나사로, 탕자, 가난한자, 꼬부라진 자, 저는 자, 소경, 수종병자로 추측할 수 있다. 작은 자나 작음은 미성숙한 제자, 젊은 이, 랍비적 문헌 안에선 미성숙한 학자의 함축을 가진다. 그들은 세상의 가치세계에선 중요하지 않아 보이고, 신성한 가치 안에서는 속죄할 수 없는 것(irredeemable)처럼 보인다. 어린 아이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두 가지를 나타내 준다. 첫째,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자신의 하찮음을 정확하게 깨달아야 하며, 두 번째 이른바 작은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하찮지 않다는 것을 드러낸다.(18:15-17) 결과적으로 우리는 그들을 예수의 이름으로 영접하고, 절대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해야 한다.

 

-17: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환영받은 탕자로부터, 누군가는 죄는 무시되어져야 하는 것이라고 인상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올바르지 않다. 탈무드의 훈계(진심으로 다른 이들을 사랑하고, 만약 어떤 이가 너에게 죄를 범하거든 그에게 평화롭게 말하고, 증오하지 말고, 너의 영혼 안에서 간교한 속임수를 유지하지 말라)는 이 명령이 얼마나 유대적 신앙심과 비슷한지를 보여준다.

형제는 동료제자들에 대해 그리스도 안에서 제자들에게 친밀감을 주는 신약용어이다. 형제가 기준을 잃었을 때, 그 또는 그녀는 직면해야 하고, 고쳐져야 한다. 탕자의 형이 보여준 태도는 제자들이 반드시 피해야할 태도이다. 제자공동체는 스나이퍼 공동체가 아니다. Stauffer는 이 함축을 자세히 설명했다. “책망은 하나님 앞에서 공동의 죄책감을 인식하는 것과 성령에 의한 무조건적 용서를 수반해야 한다.”

 

-17:5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믿음을 더해 달라는 제자들의 요구는 난데없이 나타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이러한 요구사항들(실족치 않게 하는 것, 항상 용서하는 것)을 감당할 수 없는 것으로 인식했다. 그래서 더 나은 믿음을 요구한 것이다.

 

-17:6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예수님은 이 요청에 전형적으로 생생하고 아주 형상적으로, 그들이 추가적인 믿음의 신성한 혼합이 없이도 지금 이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납득시키신다. 이 문장은 혼합된 상황의 형식이다. 번역할 수 없는 불변화사(관사·전치사·접속사 따위 어형 변화가 없는 것)와 함께 불완전한 직설법을 더한 그 (조건문의)귀결절(apodosis)은 두 번째 차원의 상황이다. 이것은 사실에 반대되는 추측이다. 두 번째 차원의 상황의 전제절은 일반적으로 “if"는 직설적인 분위기에서는 두 번째 시제(불완전하거나 부정과거형)을 나타내고, 그 상황이 사실 실현되지 않음을 나타낸다. 하지만 여기서 ”you have"는 현재시제이고, 이것은 첫 번째 상황에서 사용되는 것이다. 이것은 그 상황의 실제성을 나타낸다.

만약 누군가 이것을 실제 상황에 반대되는 의미로 번역했다면, “if you had faith"는 제자들이 아주 작은 믿음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 이 언급은 부드러운 책망이 된다. 만약 그들이 아주 작은 믿음을 가졌더라면, 그들은 기적을 행할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 이것을 첫 번째 시제로 해석했다면, 이것은 발언의 진실성을 나타낸다. 적어도 토론을 위해: “if you have faith" / 그들의 믿음을 더해 달라는 요청은 그들이 이미 믿음을 가졌다는 것을 당연하게 나타내준다. 그리고 예수님의 대답은 그들을 수정시키거나, 책망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들이 충분한 믿음을 가졌고, 더 이상 필요치 않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 대답은 누가복음의 전체적 패턴에 알맞다. 8:25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호수 안, 폭풍에서 두려워함을 부드럽게 책망하신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이것은 그들이 믿음을 가졌음을 나타낸다. 대조적으로 평행구절 막4:40에서는 너희가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마8:26에서는 믿음이 적은 자여라 한다. 누가의 좀 더 긍정적인 서술의 경향은 이 문장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정당화한다.

뽕나무를 옮기는 것은 지역적인 이미지이다. 이것은 아마 넓고 깊은 뿌리를 가진 검은 뽕나무일 것이다. 이것을 완전히 뽑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여겨진다. 평행구절인 마17:20에서 산을 옮기는 것처럼. 이것을 바다에 심는 것은 불가능한 것보단 오히려 기괴한 일처럼 보여진다. 이 말의 함축적인 의미는 작은 믿음도 기적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다.

 

-17:7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이 구절에서 너희 중은 명확하게 우리 중 아무도 없다는 것을 예상(anticipate)하도록 한다. 이것은 주장을 밝히기 위해 세상의 방법 중 과장된 상황을 보여준다. 밭에서의 종의 고생이 고되다 할지라도, 누구나 당연히 그 종이 집 안에서의 의무도 반드시 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Sir33:25-30에 나타난 종들에 대한 태도는 이 비유의 실제적 추측에 대한 이해적 배경을 제공한다. 이것은 지중해적 세계관을 반영한다. 그것은 주인은 존엄을 유지하기 위해 경계를 유지해야 하는 것이고 종들은 친구처럼 대해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 비유는 종은 혼자이며, 주인이 아니고, 의무 아래에 거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노예제도의 부당함을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는 제자들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책임감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 일상의 실재로부터 소재를 끌어왔다.

 

-17:8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오히려 ~라 말하지 않겠느냐는 질문은 라는 대답을 기대한다. 이것은 정확히 아무리 종이 밭에서 고생했다하더라도 주인이 종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주인은 정당한 수입을 하는 사람이라 여겨진다. 그의 하인은 또한 목자와 요리사이다. 이 비유의 요점은 눅12:35-38에서 종의 격상과 조화를 이룬다. 그 비유에서는, 상황이 정반대이다. 주인이 자정에, 종이 깨어 있는 것을 보자 종을 섬긴다. 이것은 마지막 때 그리스도의 재림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종들의 지상 의무가 끝났을 때에 심판을 말해준다.

 

-17:9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헬라어 ‘not'’no'라는 대답을 기대한다. 질문을 읽어보라. 그가 종에게 호의를 갖는가? 이 문장은 아마 종의 충성에 대한 주인의 감사를 언급하는 것이다. “to have favor" 구조는 딤전1:12와 딤후1:3 안에서 여격의 사례(dative case)”to thank"의 의미를 더한다. 하지만 이 문장은 또 “show favor"나 누군가에게 특혜를 준다는 뜻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이 비유는 세네카에 의해 요약된 종에 대한 태도의 가정에서 도출된다. 그는 한 종이 주인과 이익에 관하여 상의할 수 있는가? 그의 충성이 단지 의무로써 하는 것이 아닌 아주 풍성하게 하는 것이라 해도 감사할 자격이 없지 않은가?”라고 묻는다. 다시 말해서, 종이 그의 의무를 다함으로써 그 주인의 후원자(patron)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비유에서 주인과 종은 하나님과 그를 섬기는 자들과의 암호(cipher)이다. 왜냐하면 이 비유는 주인과 종의 관계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충성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고대 사회에서 신들을 섬기는 것에 대한 실리적인 기대를 깨부순다. 그들은 그리스-로마 종교관에 물들어 있었다. 이것은 신들에게 공적인 예배를 드리고 기록된 규율을 따르는 것에 대한 보답으로 복이나 편의를 유도한다고 생각했고, 그렇지 않으면 더 실용적인 신을 찾아 섬겼다. 그 신들은 예배자의 경배와 섬김을 특별한 이익으로 보답하는 것으로 기대되어졌다.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것은 주인의 대한 의무가 보상을 이끌어내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신다. ‘Resseguie'는 요점을 포착한다. “복종은 인간의 주도권과 신성한 의무에 기초하기 보다는 신성한 주도권과 인간의 의무에 기초하고 있다.” 이 비유는 하나님과 그분을 섬기는 자들의 관계가 후원자와 의뢰인의 관계, (의뢰인은 도움과 섬김의 보상으로 후원자로부터 이익을 받는다.) 와 유사한 것이 아님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이 구절을 더 명확히 하기 위해서 이 구절은 너는 감사를 보이지 마라보다도 너는 종에게 특별한 편의를 주지 마라로 보여 진다.

 

-17: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7-9절은 마지막 절 안에서 듣는 자들이 주인이 오직 그들을 종의 역할로만 몰아넣게끔 보는 관점에서부터 어떠한 것을 보도록 만든다. 이것은 독자들이 기대했던 것같이 이어지지 않는다. “너의 종에게 명령하라...”보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는 우리의 명령받은 일을 다 한 후에 무익한 종이라 고백해야한다. 우리는 탕자의 형이 말한 것처럼 하면 안 된다.(15:29;cf. 18:12,21) 지금 이 비유는 그래서 뭐?”라고 반응한다. 우리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향한 충성은 하나님을 우리의 빚진 자로 만들지 않는다. 우리가 해야 할 모든 일은 하는 것에 대해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종으로 유지시킨다는 것이다.

무익하다는 형용사는 달란트를 받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묻어두었던 종에게 적용된다.(25:30) 그는 바깥 어두운 곳에 내쫓기었다. 그러나 누가의 글에서, 이 종은 그의 의무를 다하였다. 그래서 이것은 우리가 어떤 특별한 가치 있는 존재가 아니라 무익하다는 의미를 더 잘 이해하게 해준다.

그 바리새인들은 그 여행 이야기 부분에서 당당히 지는 것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들의 영적 계승자들은 이 비유와 같이 보상과 관련하여 우리의 가치덕분에 하나님으로부터의 보상 받을 수 없다는 비슷한 관점을 기록했다. 예를 들어, 'Soko''Antigonus'는 사랑받기 위해 주인을 섬기는 종이 되지 말고, 사랑받는 것 때문이 아니더라도 주인을 섬기는 종이 되라고 말한다. 그리고 하늘을 경외하는 마음이 너를 압도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에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은, 그의 사도적 소명에 대한 것과 같은 것을 말한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9:16) 누구든 자신의 공덕에 대한 보상을 기대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것들이 없기 때문이다.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수 없다.(3:27) 또한 예수님의 좌우편 보좌에 앉는 영광을 기대할 수 없다.(10:37)

 

신학적 적용

1. 믿음의 성장

제자들은 최소한 약간의 믿음은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것이 불가능한 일을 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확증시키신다. 그들은 더 이상의 믿음이 필요 없다. 그들이 가진 아주 작은 믿음도 예수님이 요구하신 것들을 하기에 이미 충분하다. 하지만 이 주장을 기적이 마음속에 있다는 것으로 해석해선 안 된다. 세상을 놀라게 하는 위업은 두려움을 주기 위해 행해진다. 이것은 예수님의 의도가 아니다.

예수님이 마음에 품은 기적은 좀 더 일상적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것도 역시 기적이다. 이것은 소자를 실족시키는 것이 아니며, 다른 제자들의 죄를 그들이 회개 할 때 끊임없이 용서해주는 것이다. 믿음은 우리가 자연을 조종할 수 있게 하거나 우리의 명령을 하나님이 하도록 하는 마법의 형태가 아니다. 믿음은 우리가 하나님이 요구하신 것을 하기 위해 능력을 받았다는 것을 신뢰하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의도에 대한 반응이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의 요구를 하기 위해 충분한 믿음을 얻기 까지 기다린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못할 것이다. 믿음을 더해달라는 요청은 불신앙에서 근거한다. Green의 관점대로 본 것 같이, 믿음은 기질같이 많은 소유가 아니다. 요구되는 것을 하는 것은 믿음의 성장을 가져온다.

 

2. 하나님에 대한 의무를 신실하게 이행함

이 비유는 이 신학적 관점을 만드는데 약한 자를 강한 자로 이동시킨다. Manson은 이 요점을 찾아냈다. “만약 한 평범한 사람에게 그의 종으로서의 역할에 대한 더 많은 요구를 하도록 하게 된다면, 그리고 단지 그 사람만의 유익이나 편함을 위한 것이라면, 얼마나 더 많이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견고케 함 안에서 그의 종으로서 최상의 것을 요구할 만 한가!” 누구든 하나님께 요구받은 것을 한 후에 칭찬을 기대해서는 안 되고, 혼자서 만족해야 한다.

이 비유는 우리는 단지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것과 그 이상이 아니라는 것과 그리스도는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는 가차없는 주인이라는 불편한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만약 이런 섬김과 복종이 지구상의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 기대되어 지는 것이라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는 얼마나 더 그래야 하겠는가. 믿음의 섬김은 종의 역할을 바꾸거나 고양시키지 않는다. 그들의 의무를 신실하게 이행한 후에 종은 주인의 신분으로 승진되지 않고, 계속하여 그들의 의무를 신실하게 이행할 것이 요구된다.

이 비유는 종의 전적인 자기부인을 요구한다. 유사하게 그리스도의 종은 그들 자체의 요구를 우선적으로 기대 할 수 없다. 대신에 그들의 무리는 주인이 요구한 모든 것을 해야 한다. 그 본문 안에서 요구된 의무는 다른 이들을 실족치 않게 하는 것과 형제를 용서하는 것, 겨자씨만한 믿음을 가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요구되어지는 의무의 전체가 아니다. 거기에는 언제나 더 해야 할 것이 있다. “어머니의 일은 절대로 끝나지 않는다.”는 말과 같이 rfltmeh의 종도 이와 같다. 사역은 절대로 끝나지 않는다. 누구도 영생을 받기 위해 내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고 질문하고 내가 그것을 했습니다.“라고 대답 할 수 없다. 누구도 하나님과의 계산 청산을 요구할 수 없다.

 

3. 보상을 바라지 않는 섬김, 예배, 충성(SERVICE)

이 비유는 바리새인적 자가 의로움에 반대되는 것으로 향해진다. 하지만 제자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것 같이 된다. 누가는 또한 선교에 특별한 사명을 부여받은 복음전도자에게도 이것을 적용시키려 한다. 그들은 아마 밭에서 돌아왔을 때 그들의 일이 끝났다고 주장하고, 그들의 밭일에 우선순위를 두고, 자기 소유권을 가지려는 경향이 있는 자들일 것이다. 이것은 보편적으로 자기들이 하루 종일 일했으며, 특별한 인지와 (급료이외의)특전을 받을 만 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적용될 수 있다. 칭찬할 만한 충성은 그 주인에게 빚을 지우지 않는다. “주인이 아무 것도 안했고, 섬김을 받았어도, 그 주인은 우선 어떠한 요구를 받을 만하지 않다.” 이 신학은 고린도전서 9장에 나타난 것 같이 그의 사도적 소명의 이해를 만들어 준다.

이 비유는 또한 하나님 앞에서 칭찬을 벌 수 있다는 것과 하나님의 목적이 우리를 섬기는 것이라는 종교적 관점에 도전을 건다. 이 비유는 의무로 세워진 스스로 사로잡힌 종교적인 마음가짐을 수정시켜준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종이 되어야 한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다음에 나오는 17:20-37절의 종말론적 경고는 우리에게 모두가 심판받는 하나님의 다가오는 침투를 상기시켜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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