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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7:40-52 설교 "편견에 눈이 먼 종교인" - 베이직교회 뭇별예배 설교문

일하는 목회자 발행일 : 2023-05-03

믿음은 놀라운 능력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믿음은 과연 어떤 믿음입니까? 많은 믿음이 있지만 단순하게 둘로 가른다면 바른 믿음과 빗나간 믿음입니다. 이로운 믿음과 해 로운 믿음입니다. 통합하는 믿음과 분열시키는 믿음입니다. 언제나 이 같은 두 가지 큰 흐름의 믿음이 인간 안에 존재해왔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해로운 믿음이 세상을 어지럽 혀왔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어떻습니까? 해로운 믿음이 끼치는 해악이 얼 마나 큽니까? 더 놀라운 것은 해로운 믿음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좀처럼 그 믿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왜 못 벗어날까요? 오늘 말씀은 그 이유를 알 려줍니다.

 

 

요한복음 7장 설교 썸네일

 

요한복음 7:40-41

40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이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41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예수는 누구신가? 예수님 공생애 동안 시종 궁금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때로 극심한 반 발에 부딪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하게 공언하셨습니다. 오병이 어의 표적을 보이시고 선포하셨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 라. 그러면 영생하는 생명이 네게 있을 것이다. 지금도 대다수가 외면하는 말씀입니다. 초막절에는 성전에서 외치십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 는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누가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아무렇게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더구나 흘려 듣 기에 너무나 부담스러운 말씀입니다. 당연히 반응이 나뉩니다. 이 사람은 성경이 말하는 그 선지자가 맞다.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그 선지자에 대한 얘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세가 말했던 그 선지자, 곧 메시아입니다.

 

신 18: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예수님의 표적을 주목한 사람들은 예수님이 바로 그 선지자라는 생각을 갖기 시작했고,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바로 그 선지자라는 믿음을 고백하기 시작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원이었던 니고데모 같은 사람은 예수님을 찾아와서 사실 여부를 직접 확인하고자 했 습니다. 또한 여러 가지 표적들로 인해 그런 고백을 하는 자들의 수가 늘어났습니다.

 

요 6:14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 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갖기 시작하자 그 믿음을 조롱하고 반박하는 자들의 반 발은 더 노골적이 되고 더 거칠어졌습니다. 그 중에 가장 강력한 비판의 명분이 지역성 이었습니다. 갈릴리와 같은 변두리에서 어떻게 메시아가 날 수 있느냐?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종교인들의 흔들리지 않는 생각과 태도는 갈릴리와 같은 곳에서 메시아가 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후에 예수님의 제자가 된 나다나엘이 처음 빌립으로부터 예수님 얘기를 듣고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코웃음을 쳤던 것과 같은 태도입니다. 그러나 이 생각은 사실 변두리에서 메시아가 나서는 안 된다는 편견, 선입견, 고정관념에서 비롯된 생각입 니다. 이 태도는 뿌리깊은 자기중심성에서 뻗어 나온 교만의 가지입니다.

 

 

요한복음 7:42-43

종교 엘리트 그룹은 단순히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을 믿는 일반인 들과 구별되어 토라, 구약 성경 전체에 통달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일반적인 수준에 해 당하는 쉐마교육이나 회당교육을 넘어 개인적으로 랍비들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613 개 율법을 다 알고 다 준수하기 위해 평생 모든 노력을 다하며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당연 히 메시아가 어디서 나와야 하는지 율법을 통해 알았습니다. 다윗의 혈통이어야 하고 베들레헴 출신이어야 합니다.

 

렘 23:5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 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미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그런데 예수님은 누구의 가지에서 나왔으며 정확한 출생지가 어딥니까? 종교인들은 분명 성경은 알았는데 예수님을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성경대로 왔는지 여부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왜일까요? 그들에게 예수님은 메시아여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갈 릴리에서 일생을 보낸 목수의 아들이 어떻게 메시아일 수 있습니까? 어떻게 그런 자가 유대교 성전 제도 위에 메시아로 군림할 수 있습니까? 그런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고 결코 생각해서도 안될 일입니다. 그 결과 예수님이 성경의 예언대로 오셨다는 것 을 알아볼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복음서를 기록한 요한은 이 육신의 혈통에 일차적인 비중을 두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이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예수님의 출생 기원을 인간의 혈통에 제한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기록한 출생의 예언이 잘못 되었다거나 의미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것보다는 예수님이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스스로 반복해서 말씀하신 내용이 비할 수 없이 중요한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위로부터 보냄을 받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오셨습니다.

 

요 7:28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니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7:29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 하시니

 

예수님은 반복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내가 스스로 오지 않았다. 나는 하나님에게서 났다, 나는 하나님이 보내셨다, 나는 아버지를 안다, 너희는 아버지를 모른다. 들으면 들을수록 화가 나는 사람이 많았을 것입니다. 평생 성경 연구에 시간을 바친 사람들과 일생 성전 에서 제사 드리느라 허리가 휜 사람들은 나이 오십도 못된 자가, 그것도 제대로 된 랍비 에게 한번도 배워본 적이 없는 자가 이런 소리를 하는데 분노하지 않으면 이상하지요. 때문에 오히려 성경이나 성전과 별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 예수님이 누구신지 단번에 알 아챘습니다.

 

요 9:33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날 때부터 눈먼 자의 얘깁니다. 하나님 전문가들이 예수님이 안식일에 이 눈먼 자 눈을 뜨게 한 것에 격분해서 그를 심문하자 그의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의 말 을 듣지 않으시고 하나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듣지 않으시냐고 오히려 바리새인들 을 빈정댑니다. 과연 어느 쪽이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있으며 대체 어느 편이 예수님을 알아본 것입니까? 분명 종교 전문가들보다 나중 되었지만 뒤늦게 눈뜬 이 사람이 그들보 다 먼저 된 것 아닙니까?

 

우리는 이미 사마리아 우물가 여인을 만났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자기들과 함께 머무르도록 청하고 그리고 직접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믿은 사마리아 사람들도 만났습니 다. 그런데 왜 이토록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다는 자들은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이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그토록 잘 아는 존재가 하나님이어야 지 자신들의 생각을 뒤집어 엎는 하나님은 하나님이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7:44-46

44 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더라
45 아랫 사람들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로 오니 그들이 묻되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 였느냐
46 아랫사람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 하니

 

예수님을 잡아오라고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보낸 자들이 초막절 동안 예수님 주변 을 맴돌았지만 손을 댈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 때문이었을 것이고, 예수님의 권위 때문이기도 했겠지요. 그러나 그들이 돌아와서 보고하는 내용을 들으면 예 수님 붙잡으러 갔던 자들의 마음에 동요가 일어났습니다.

 

이때까지 예수님처럼 말해준 사람이 없었습니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하나님에 대해 듣고 배웠던 것과 전혀 다른 하나님을 보고 들었습니다. 그런 얘기지요. 종교인들이 사람들을 종교의 틀에 가두어놓고 주입식 교육으로 가르친 하나님 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이 만든 우상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귀가 열리고 눈을 뜬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직접 들으니 그 말씀은 평생 처음 듣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충격적이었을까요? 진리가 뒤흔든 지진입니다.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누구든지 오라. 늘 죄의식에 시달리며 항상 허기지고 목마른 자들에게는 그 말씀 자체가 생수입니다. 생명입니다. 혼과 영과 육이 쪼개지는데도 이상하게 희열이 있습니다. 말씀 이 내 마음과 생각과 뜻을 마치 생선 가시에서 살을 발라내듯 갈라놓으니 하나님이 분명 해집니다. 원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흐를 것이라는 말씀은 구약의 약속입니다. 예수님께 서 이제 그 약속을 지키시겠다는데 심장이 요동치지 않으면 죽어있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슥 14:8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 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겔 47:1 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문에 이르시니 성전의 앞면이 동쪽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 오른쪽 제단 남쪽으로 흘러 내리더라

 

구원은 생수가 솟아나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우물가 여인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한번 솟아나기 시작하면 그 물은 멈추지 않습니다. 요한은 후에 계시록을 기록하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다시 기억합니다.

 

계 21: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 생명수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부어주실 성령님입니다. 그러 나 바리새인들에게는 예수님의 어떤 말씀도 들리지 않습니다. 귀가 멀어 안 들리는 것이 아니라 듣지 않겠다고 결심했기에 안 듣는 것이고, 들을만한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굳게 믿었기에 그냥 흘려버린 것입니다. 그들은 실로 빗나간 열심과 잘못된 믿음 때문에 진정한 믿음의 대상이 눈 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 것이 아니라 믿음으 로 믿음을 저버렸습니다.

 

 

요한복음 7:47-49

47 바리새인들이 대답하되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48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자가 있느냐
49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바리새인들의 분노가 폭발합니다. 너희들도 미혹되었느냐, 길을 잃었느냐, 속아넘어갔느 냐?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누가 예수 믿느냐, 제대로 된 신앙을 가지고 너희들을 다스리고 가르치는 자들 중에 예수 믿는 자가 어디 있느냐? 당시 신앙의 기준은 공회원 과 바리새인, 율법학자와 서기관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가장 잘 아는 자들입니다. 그들의 주장은 율법을 알고서는 예수를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을 몰라서 예수를 믿게 되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예수 믿는 무리는 저주받은 자들이라고 결론 짓습니다.

 

우리는 이런 결론에 이르는 생각의 틀을 편견이라고 부릅니다. 또는 선입견이라고 합니 다. 일상의 말로는 색안경이라고도 표현합니다. 사실 누구나 어떤 형태로건 편견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일생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이 곰곰이 살펴보면 다 편견의 원천입니다. 우리 가 생활하는 모든 환경이 편견으로 차고 넘칩니다. 누가 누구에게 왜 그런 편견을 갖고 있느냐고 따지거나 나무랄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사고방식입니다. 예수님께서 비판을 금 하신 것도 죄인들이 태생적으로 가진 편견 때문입니다.

 

마 7: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마 7:2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 이니라

 

창세기에서 시작된 하나님에 대한 반역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선악을 안다는 것은 좋고 나쁘고’를 내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종교인들이 예수님 께 가장 많이 질책 받은 것은 바로 자신들이 세운 이 좋고 나쁘고’의 기준을 하나님의 잣대라고 고집스럽게 들이대는 버릇 때문입니다. 모든 편견 가운데서 가장 심각한 편견, 정녕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편견이 바로 이 좋고 나쁘고’의 편견입니다. 예수님은 이 좋고 나쁘고’의 편견을 뿌리뽑기 위해 오셨습니다. 편견의 기준 대신 온전한 사랑의 기준으로 새롭게 통합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7:50-52

50 그 중의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그들에게 말하되
51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
52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찾아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니고데모가 예수님에 대한 판단에 신중을 기하도록 제동을 겁니다. 이 말을 들어보면 니 고데모가 그 동안 소리 없이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 님을 변호합니다. 그러자 다들 발끈합니다. 같은 공회원들 간에 해서 안될 말을 합니다. 너도 갈릴리 출신이냐? 갈릴리 출신 선지자가 어디 있느냐? 거기서 어떻게 선지자가 나 올 수 있느냐? 편견은 교만과 함께 무지의 소산이기도 합니다. 갈릴리 출신 선지자가 여럿입니다.

 

왕하 14:25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영토를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요나의 고향 가드헤벨은 갈릴리에 있습니다. 요나만이 아닙니다. 호세아, 나훔, 아모스, 엘리사도 갈릴리 지역 출신입니다. 그런데 왜 갈릴리에 선지자가 없다고 했을까요? 그들 이 제대로 몰랐거나 의도적으로 무시했던 것입니다. 실제 당시 유대 사람들이 갈릴리 사 람들에게 보인 멸시는 너무나 공공연하고 일반적이었습니다. 우리가 맹구 시리즈를 만들 었듯이 그들은 갈릴리 사람이 얼마나 언변이 부족하고 변변치 못한 사람들인지를 웃음거 리로 삼는 시리즈 문헌을 만들었을 정도입니다.

 

마 7: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마 7: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편견의 풍토에서는 결코 좋은 나무가 자랄 수 없고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언제나 판단이 빗나갑니다. 그릇된 판단을 일삼는 자들은 반드시 무리를 짓습니다. 당을 만 듭니다. 그 무리는 모여서 다시 집단 편견을 만듭니다. 유대 사람들은 갈릴리 사람들에 대해 집단적인 편견을 가졌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마리아 사람을 비롯한 모든 이방인 들에 대해 확고한 집단 편견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집단 편견은 개인의 편견을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고착화하고 더욱 폭력적으로 만듭니다.

 

이 시대는 어떻습니까? 디지털 시대는 예수님 당시와 전혀 다릅니까? 이토록 많은 미디 어가 있고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얼마나 다양성이 존중 하는데 어떻게 지금과 당시를 비 교할 수 있느냐 그런 생각이 드십니까? 그것도 편견입니다. 미국 대학은 현재 이른바 정 치적 올바름이라는 명분으로 만연한 편견 때문에 누구도 자기 의견을 쉽게 표현하지 못 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신앙의 자유마저 뿌리째 흔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바로 그 동일한 편견이 도처에서 누군가를 희생제물로 삼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이 짙은 편견에 물들고 강력한 확증편향성으로 더욱 날이 시퍼래진 현실에 맞서야 합니까?

 

설교 후 기도

기도: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의 보혈로 정결케 된 그리스도인들만이라도 편견의 틀에서 자유하게 하소서.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보내신 뜻에 합당한 화평케 하는 자들로 살 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나눔을 위한 질문

1. 과연 어떤 열정이 나로부터인지 하나님으로부터인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2. 우리 자신이 갖고 있으나 얼른 의식하지 못하는 편견은 어떤 것입니까?

3. 교회가 직면한 이 시대의 대표적인 편견은 무엇이며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4. 미디어가 현실에 끼치는 편향성은 무엇이며 어떻게 대응해야 좋을까요?

5. 지금과 같은 현실에서 우리 각자는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까?

 

편견에 눈이 먼 종교인_요한복음 7장 40-52절(20230430).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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