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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7:1-24 설교 "때에 맞는 준비를 하다" - 베이직교회 뭇별예배 설교문

일하는 목회자 발행일 : 2023-04-20

요한복음 7장 설교문 썸네일

 

때에 맞는 준비를 하다(요 7:1-24)

우리는 모두가 시간 속을 살아갑니다. 시간의 특징은 유턴이 없다는 것입니다. 한쪽 방향을 향해서만 흘러가는 것이 시간입니다. 한 번 흘러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지나가면 끝입니다. 돌이키지 못하는 시간 속을 사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때를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적정 시기를 놓쳐서 일을 그르치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골든 타임 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골든 타임을 놓쳐서 사람이 생명을 잃기도 하고, 회사가 부도를 맞기도 하고, 인간 관계가 파국에 이르기도 합니 다. 잘 산다는 것은 곧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타이밍에 대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예수님만 하시는게 아니라 예수님의 주변 사람들도 타이밍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문제는 서로가 생각하는 때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지금이 적기라고 말하는 예수님의 동생들에게 예수님은 지금이 적기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때와 인간의 때는 어떻게 다르고 왜 다를까요?

 

요한복음 7:1

1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예수님에게 살의를 품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예수님은 그들의 손에 잡혀 죽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유대 지역, 예루살렘 쪽으로 가시는 것을 피하셨던 걸까요? 예수님은 그들의 손에 잡혀 죽는 것이 두려워서 유대 쪽으로 안 가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것을 생각하며 사신 분입니다. 죽는 것이 두려우셨던 것이 아니라, 지금은 죽어야 할 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될 때를 기다리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7:2-5

2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3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4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5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유대인들의 3대 명절이 있습니다.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입니다. 명절이 되면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갑니다. 모세의 율법에 명시된 여호와의 절기를 철저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명절에 예루살렘은 성지순례객들로 인해 미어터집니다.


예수님의 동생들은 바로 이 때가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형이 슈퍼스타가 될 수 있는 기회 말입니다. 세상의 모든 눈이 주목하는 자리에서 오병이어와 같은 사건 한 번만 더 일으키면, 우리 형의 위상이 달라질 것이고 덩달아 온 가족이 인생 역전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 들어올 때노 저으라고, 지금이 노 저을 때라는 것이 예수님의 동생들의 판단이었습니다. 형, 갈릴리 시골에서 이러지 말고 우리 큰 물에서 대박 한 번 터뜨려 보자. 형 정도면 충분히 할 수 있어. 식구들도 생각 해야지.” 성경은 동생들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예수를 믿지 않아서 라고 합니다(5절).


우리가 예수님께 구하는 기도 내용을 살펴보면 예수님을 믿는 것인지, 믿지 않는 것인지 알 수 있습 니다. 기도한다고 예수님을 다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기도하기도 하지만, 예수 님을 안 믿어서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동생들이 예수님에게 하는 요구와 내 기도의 결이 비슷하다면 예수님을 안 믿어서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기도부터 달라집니다. 내것 구하지 않고 그의 의 와 그의 나라 를 구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동생들도 예수님을 안 믿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가장 가까이 있었습니다. 누구보다 예수님을 잘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예수 잘 안다 는 것입니다. 알고도 못 믿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잘못 알았기 때문입니다. 가장 깨기 힘든 것이 편견입니다. 고정관념입니다. 내가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이 전부일 것이라는 착각, 내가 누구보다 예수를 잘 알고 있다는 착각 때문에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 무슨 일을 하시든 자기의 편협한 시야 안에다가 예수님 가두어 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오래 알았다고 더 많이 아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을 50년 안 것과 1년 안 것에 차이가 나면 얼마나 나겠습니까? 별 차이가 없기 때문에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기도 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기도 합니다.


잔뜩 오해하고 있는 동생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7:6-8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7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 8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나는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9 이 말씀을 하시고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니라


아직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기다리고 계시던 때와 동생들이 기다리던 때는 완전히 달랐 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의 제물이 될 타이밍을 기다리고 계셨고, 동생들은 예수님을 등에 업고 자신 들이 출세할 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는 목적이 다르면 때를 분별하는 안목도 달라집니다. 교회에 와서도 저 사람 과 친해지기 위한 때를 호시탐탐 노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에게는 예배 시간도, 기도 시간도, 성경을 읽는 시간도 그 사람 과 친해지는 기회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예배 시간에 자세를 바르게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 사람 의 눈에 믿음 좋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한 것 뿐입니다.


예수님은 죽기 위해 사셨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 삶의 목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머릿속에는 언제 십자가를 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가? 이 생각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러니 동생들이 생각 하는 출세의 때와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고난의 때가 다를 수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삶의 목적이 분명하지 않으면 삶에 찾아오는 기회의 다양함 때문에 인생이 흔들립니다. 기회가 다기회일까요? 욕심, 야욕을 성취하는 것이 목적인 사람에게 기회의 다양함은 위기일 뿐입니다. 돈 벌 기회, 성공할 기회, 아파트 마련할 기회, 투자할 기회 등 이 모든 것들은 기회의 탈을 쓴 유혹입니다.

 

사기 당해서 망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기회에 속습니다. 내 인생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모르면 온갖 유혹이 다 기회로 보이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 사십니까? 예수님은 죽기 위해 사셨습니다. 목숨을 걸만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알고 사셨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십자가에 목숨을 거셨습니다. 내 인생에 뭘 하다가 죽어도 좋을까? 이 고민이 해결된 사람은 어떻게 살 것인지 가 명확해 집니다. 하다가 죽어도 좋은 일, 그 일을 발견한 사람이 가장 행복하게 삽니다. 그걸 모르니까 여기 기웃, 저기 기웃 하는 것입니다. 지금이 때인가? 아직은 때가 아닌가? 저번에 그 집을/그 종목을 샀었어야 했나? 그 때, 회사를 그만 뒀었어야 했나? 이 고민의 굴레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를 어떻게 분별합니까? 사는 목적이 하나님의 뜻에 맞으면 하나님의 때가 분별이 됩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지금은 때가 아니다”라고 분명하게 아실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삶 속에 성취되는 것을 목적으로 사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게 분명하지 않으면 지금이 출세의 절호의 기회 라는 주변의 부추김에 흔들리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7:10

10 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에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은밀히 가시니라

 

예수님이 안 올라가실 것처럼 얘기하시고는 올라가셨습니다. 그런데 은밀하게 아무에게도 나타내지 않고 올라가셨습니다. 나중에 유월절이 되어서 십자가를 지러 성전에 입성하실 때는 나귀를 타고, 사람들의 환호성을 들으며 다소 요란하게 올라가셨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드러나야 할 때와 드러나지 말아야 할 때를 분별하셨습니다. 소리를 내야 할 때와 숨을 죽어야할 때를 분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일부러 타이밍을 어긋나게 해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십니다. 14 절에 보면, 명절 중간에 올라 가신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초막절 기간은 7 일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3 일정도 지나서 올라가신 것입니다.
테니스나 탁구와 같은 구기 종목에는 공을 치는 다양한 타점이 존재합니다. 반박자 빠르게 처리해야할 공이 있고, 반박자 느리게 처리해야 할 공이 있습니다. 고수일수록 박자를 쪼개는 능력이 뛰어나 고, 타점도 정확합니다. 악기 연주나 댄스에도 레이백(Lay back)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일부러 타이밍을 살짝 늦추신 것입니다. 초막절 명절의 열기가 한 풀 꺾이실 때까지 기다리신 것입니 다. 왜냐하면 모든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7:11-13

11 명절중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으면서 그가 어디 있느냐 하고 12 예수에 대하여 무리 중에서 수군거림이 많아 어떤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무리를 미혹한다 하나 13 그러나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므로 드러나게 그에 대하여 말하는 자가 없더라


이번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온 사람들의 최대 관심사가 무엇입니까? 예수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들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듣고는 이번 명절에 예루살렘에서 한 번 볼 수 있겠지? 라는 기대감에 부풀 었습니다. 그들은 명절에 예루살렘에 오자마자 예수님을 찾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레이백 하지 않으 시고 동생들과 함께 올라갔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동생들은 우리 형이 예수라고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 했을테고, 예수를 죽이려는 세력들은 나름대로 함정을 파놓았을텐데, 하마터면 십자가가 아니라 초막절 텐트 더미 사이에서 죽음을 맞이하실 수도 있었겠지요. 이번 초막절은 결정적 때가 아니라, 빌드업이 필요한 때이기에 예수님은 명절 분위기가 한 풀 꺾였을 때, 조용히 성전에 올라가 십니다. 그리고는 하실 일을 또 하십니다. 빌드업 작업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7:14-15

14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 15 유대인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이번 명절은 내 때가 아니라며 성전에 안 올라가실 것처럼 말씀하시고는 올라가시고, 아무에게도 안알려주고 은밀하게 올라가시고는 그 다음에 자신을 드러내놓고 가르치시는 것은 왜일까요? 예수님이 하나님의 때를 분별하는 디테일이 얼마나 섬세한지를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예수님의 강론을 들은 유대인들이 깜짝 놀랍니다. 배우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글을 아느냐? 못배워서 글도 못 읽을 줄 알았는데, 문맹은 아니네?라고 놀란 사람도 있었겠지만, 이 말속의 글 은 유대 인들이 구약성경을 일컫는 관용어입니다(모세오경을 모세의 글 , 예언서를 선지자의 글 이라고 하는 표현에서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토라 교육을 랍비에게서 정식적으로 받지도 않은 사람이 어떻게 성경을 알고 가르치지?”라는 의문과 놀라움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탁월한 것에 대한 놀라움과 더불어 시기와 질투도 섞여 있는 것이죠. 근본도 없는 학교 출신이..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성경을 배운 방식대로 배우지 않으면 성경을 제대로 알 수 없다는 오만함, 내가 배운 방식 대로 배워야 잘 배우는 것이고, 내가 믿는 것처럼 믿어야 제대로 믿는 것이라는 교만입니다.

 

요한복음 7:16-18

1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17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18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내 교훈은 나의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다 이것은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하고 묵상하고 가르치고 전하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원칙입니다. 우리는 나의 사상을 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내신념을 전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을 자기 사상과 신념으로 포장하여 가르치는 극단적인 예가 JMS 나 신천지와 같은 이단들입니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모든 사람의 가르침에는 그 사람의 사상과 신념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통으로 읽자고 하는 것입니다. 설교보다 성경 의존적이어야 하고, 사람보다 예수님 의존적이어야 합니다. 물론 설교 자의 해석, 가르치는 사람의 방법론, 삶의 경험, 묵상의 깊이와 같은 것들이 좋은 참고가 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참고 사항은 어디까지나 참고 사항일 뿐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설교를 하면서도 자기 영광을 구할 수 있습니 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보내신 이의 영광만을 철저하게 구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님의 설교를 직접 듣는 것이 사람의 은혜로운 설교를 듣는 것보다 영적인 건강에 더 유익합니다. 은혜로운 설교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은혜로운 설교자가 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 설교를 통해 하나님만이 은혜로운 분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7:19-20

19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20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예수님이 말씀을 심하게 하십니다.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다. 유대인들이 듣고는 극대노할 말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을 일생의 자부심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평생 뮤지션으로 산 사람에게 음악을 너무 모르네”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유대인들이 율법의 핵심과 본질을 모른다는 지적입니다. 핵심과 본질을 놓치고 아무리 난리법석을 떨어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율법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그런데 유대인 들은 사랑하는 것만 빼고 다 했습니다. 사랑이 빠지면 그 어떤 종교적 행위와 신앙적 열심도 다 공허합니다(고전 13).


성경을 100독 한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모르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수십년 씩믿어도 왜 예수인가? 를 모르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유대인들은 생명을 살리라고 주신 율법을 가지고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고 죽이고 있었습니다. 그 얘기가 21-23 절입니다.

 

요한복음 7:21-23

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하매 너희가 다 이로 말미암아 이상히 여기는도다 22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행했으니(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행하느니라 23 모세의 율법을 범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 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한 것으로 너희가 내게 노여워하느냐


예수님이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일로 유대인들은 화가 났습니다. 그들이 목숨처럼 지키는 안식일을 예수님이 어겼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을 하면 안되는 안식일에, 유대인들은 할례만큼은 예외를 두고 행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었다고 몸에 표시를 남기는 할례는 중요 하고, 하나님의 언약 백성을 회복시키는 일은 안 중요하냐고 반문하시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본질을 놓친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사람이 살아나고 병이 나아도 불만이었습니다.

 

요한복음 7:24

24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하시니라


외모로 판단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자기 눈에 보이는 피상적인 사실과 현상 몇가지만 가지고 속단하는 것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갈릴리 나사렛 출신이라는 것만으로 그는 메시아가 아니라고 속단했습니다. 목수의 아들이라는 것만 보고 성경을 모를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안식일에 일을 했다는 것만을 놓고 죽이네 살리네 했습니다. 예수님의 동생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이 일으킨 표적의 표면적 현상만을 보고 예수님을 슈퍼스타로 만들 생각부터 했습니다. 예수님을 자신들 출세의 도구로 삼았습니다. 하나님의 때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 깊은 곳을 헤아릴 생각은 하지 않고 내 눈에 보이는 몇가지 사실을 가지고 하나님의 때다, 아니다 쉽게 결론을 내려 버립니다.


왜 외적인 것만을 보고 판단하겠습니까? 자기중심적이라서 그렇습니다. 내 관점, 내 편견, 나의 고정 관념, 내 경험과 내 지식과 내 수준으로 판단하기에 겉에 보이는 몇가지 사실을 엮어서 그 사람을 죄인을 만들든 의인을 만들든 하는 것입니다.
요즘 SNS 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 아닙니까? 1 분짜리 영상 한 컷 놓고, 사진 몇 장 놓고, 발췌된 글귀 몇 줄 가지고, 설교 한 편 들어보고, 책 한 권, 유튜브 영상 한 편 보고는 자기 식대로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겉 모양을 보고 판단하는 것을 멈추고 공의롭게 판단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사명이기도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이 이땅에 오셔서 하실 일을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이사야 11:1-5

사 11: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11:2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11:3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 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11:4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11:5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이사야는 메시아가 눈에 보이는 대로, 귀에 들리는 대로(외모만 가지고) 판단하지 않으시고 공의로 판단하실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공의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세워두신 기준입니다. 예수님은 내 교훈 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훈을 전하셨습니다. 안식일에 사람들이 세워 놓은 기준이 아니라 안식일의 주인이신 분의 뜻 헤아려 38 년된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출세할 때가 아니라 하나 님의 때를 기다리셨습니다.


신앙이란 나 중심으로 살아왔던 모든 삶의 패턴이 하나님 중심으로 옮겨가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 다. 내 편견, 내 관점, 내 기준, 내 시야, 내 해석, 내 때가 실패하고 부서지고 무너지며 산산조각 난자리에 하나님의 관점과 시야, 하나님의 때에 대한 소망이 자리매김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인간은 자기를 계발하다가 자기에게 중독되고 함몰되고 묶여서 나로부터 헤어나오지 못하고 발버둥 치는 존재입니다. 나 밖에 모르는 것인 인간의 실존입니다. 내 관점, 내 방식, 내 때를 넘어서지 못합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이 다가오셔서 열어주신 구원의 길이 바로 자기 부인의 길입니다. 인간은 자기를 계발하면 행복해 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끝은 자기 중독입니다. 자기 부인은 겉보기 에는 죽는 길처럼 보이지만 그 길이야말로 부활의 영광을 누리는 길입니다. 생명의 길입니다. 주님께서 보이신 생명의 길을 주님과 함께 아름답게 동행할 수 있기를 소망하고 기도합니다.

 

설교 후 기도

기도: 하나님! 때를 분별하는 일이든, 사람을 분별하는 일이든, 세상을 분별하는 일이든 겉만 보고 판단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깊은 뜻을 헤아릴 줄 아는 지혜를 간구합니다.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는 성령님과 동행하길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때에 맞는 준비를 하다_요한복음 7장 1-24절(20230416).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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