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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7:25-39 설교 "생수의 강이 흐르리라" - 베이직교회 뭇별예배 설교문

일하는 목회자 발행일 : 2023-05-07

아무리 선한 일을 해도 의도적으로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고, 아무리 악해도 동조하는 사람들이 생깁니다. 동조하는 사람들이 생기고 지지하는 사람들이 생기면 악한 일을 하던 사람도 그 일을 더 이상 악하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주변의 지지와 응원에 응답하는 일이라고 여기게 됩니다. 무수한 반대에 부딪히다 보면 선한 일을 하다가도 회의가 찾아옵니다. 그래서 누구의 지지를 받는가 또는 누구를 지지하는가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히틀러 혼자 히틀러가 되었겠습니까?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타인의 지지는 그 자체로 정당성을 형성합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나를 지지하고 응원한다고 안심할 일이 아닙니다. 반대로, 거센 저항과 반대가 있다고 낙심할 일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타인의 지지나 저항보다 더 근원적인 동기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있다면 저항에도 굴복하지 않고, 지지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한 근원적 동기를 우리는 ‘부르심’, ‘소명’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7장 25-39절 설교문 썸네일

 

오늘 본문에는 크게 세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당국자들, 대중, 예수님입니다. 이 사이에서 발생하는 긴장, 갈등, 지지, 동의와 동조 같은 현상은 오늘날 우리의 관계 현실에도 그대로 드러나는 현상입니다. 본문을 함께 살펴보는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은혜를 기대합니다.

 

 

요한복음 7:25-27

25 예루살렘 사람 중에서 어떤 사람이 말하되 이는 그들이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
26 보라 드러나게 말하되 그들이 아무 말도 아니하는도다 당국자들은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인 줄 알았는가
27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하는지라


유대 당국(산헤드린 공회)이 예수님을 죽이려 한다는 사실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습니다. 알사람은 다 알았습니다. 당국자들의 음모를 아는 사람이 당국을 비꼬듯이 얘기합니다. “당국은 예수를 죽인다면서, 저렇게 대놓고 활동하는 예수를 체포하지 못하는 것을 보니까, 당국도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인정하나보네.” 그러면서 한 마디를 덧 붙입니다. “진짜 메시아는 그의 출신을 알 수 없어야 하는데, 우리는 예수가 갈릴리 나사렛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지금 그는 당국을 도발하고 있습니다. 이 도발은 효과가 있었습니다.

 

32 절에 보면 결국 당국자들이 움직입니다. 아주 민감한 이슈를 자극하면 권력자들도 움직입니다. 권력자들이 움직일 수 밖에 없는 이슈를 만드는 방식으로 세상을 자신들의 뜻대로 움직이려는 세력은 어느 시대에나 있어왔습니다. 여러 카드를 쥐고 있으면서 각각의 카드를 언제 뒤집으면 좋을지를 고민합니다. 그렇게 작동하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한 단면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의 이슈들에 너무 무감각해서도 안되겠지만 이런저런 소식에 의해 형성되는 대세나 흐름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또한 조심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왜 성경을 읽습니까? 성경은 사람들의 다양한 의도가 복잡하게 얽혀서 만들어내는 역사의 궤적을 주관하시는 또 다른 손길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세상은 경제 원리로만, 정치적 원리로만, 물리학적 원리로만 움직이는 곳이 아닙니다. 창조주가 부여한 영적인 원리가 작동하는 곳이 바로 이 세상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7:28-29

28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니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29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 하시니


예수님은 “내가 어디로부터 비롯되었는지를 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가 나를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중요한 정체성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출신 성분(갈릴리 나사렛)을 가지고 왈가왈부했지만 예수님은 더 근본적인 출신 성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에 관심을 갖고 삽니까? 어떤 부르심과 어떤 보내심을 인식하고 살고 계십니까? 부르심을 소명(calling)이라고 합니다. 보내심은 사명(mission)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출신 성분과 스펙을 넘어서는 소명과 사명이 있습니다. 나를 하나님이 부르셨다는 것이고,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이 소명과 사명은 내가 어느 교회 출신인지, 어느 교단 배경인지,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 어떤 직장을 다니는지를 넘어서게 만듭니다. 출신 성분과 스펙을 가지고 비교하는 세상 속에 살지만 비교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이 부르심이 없으면 매번 사람이 불러내는데 휘둘리게 됩니다. 이 사람이 부르면 이 사람에게, 저 사람이 부르면 저 사람에게 달려갑니다. 여기 저기서 부르는대로 우왕좌왕합니다. 자본주의란 돈이 부르는 곳에 사람들이 응답하는 시스템입니다. 돈의 부르심과 돈의 보내심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질서
를 만드는 곳입니다. 돈이 사람을 부르고, 돈이 사람을 부립니다. 누가 돈의 부름에 저항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으로부터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어느 영화를 보니까 “형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면서 돈의 유혹을 뿌리치는 형사가 있던데, 하나님의 부름이 가오보다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결혼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나를 이 여자의 남편으로 부르셨다’, ‘하나님이 나를 이 남자의 아내로 부르셨다’ 이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결혼입니다. 이 부르심이 없으니까 다른 여자가, 다른 남자가 부를 때 응답 받고 가는 것입니다.


양육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이 아이들을 우리 가정에 보내셨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주신 아이를 부모 체면을 위해 존재하는 수단으로 여기거나, 아이를 다른 아이와 비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 우리가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이고 보내심입니다.

 

 

요한복음 7:30

30 그들이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손을 댈 수 없는 여러 요인들을 분석할 수 있겠지만 성경은 상황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아직 그의 때가 이르지 않았다’ 부름 받은 사람, 보냄 받은 사람에게는 다 때가 있다는 것 입니다. 그 때와 시기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괜히 일이 밀려오는 것이 아닙니다. 괜히 일이 끊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운이 나빠서 어려운 일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운이 좋아서 좋은 일이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부르심과 보내심에 충실한 사람에게 하나님은 언제나 최선의 때를 이끌어 오십니다.

 

 

요한복음 7:31

31 무리 중의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이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하니

 

예수님에게 적개심을 품는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믿은 이유는 초자연적 현상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까? 내가 겪은 신비한 현상입니까? 누군가의 뜨거운 간증입니까? 나의 경험인가요? 아니면 과학적 증거입니까? 또는 치밀한 논리입니까?

 

예수님이 일으키신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은 결국 십자가 앞에서 다 돌아섰습니다. 믿음의 근간이 기적이었기 때문에 더 이상 기적을 베풀지 않는 예수는 그리스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요구했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와봐라” 십자가에서 스스로 못내려오는 예수는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누군가로부터 예언 기도를 들었습니까? 방언이나 치유 경험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까? 예언도 그치고 방언도 폐합니다(고전 13:8). 다 그칩니다. 심지어 만나도 그칩니다. 매일 같이 일어나던 기적이 중단될 때가 반드시 옵니다.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어서 믿습니까? 그럼 다른 연구 결과가 나오면 믿지 않으시겠습니까? 논리 정연한 설명을 찾아다니십니까? 논리는 어느 진영에나 있습니다.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칠 뿐만 아니라 ‘지식도 폐하리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고전 13:8). 끈끈한 인간 관계가 좋아서 신앙생활을 하십니까? 좋았다가 나빴다가 하는 것이 인간 관계입니다.

 

신앙을 내 경험이나 이성, 과학적 연구, 논리적 변증, 인간 관계 위에 올려두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일 수 있습니다. 일시적으로 도움이 될 수는 있겠지만 신앙은 반드시 말씀 위에 세워져야 하고 말씀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나의 뿌리는 어디에 내렸는지를 확인하고, 그 뿌리가 말씀이 아니라면 옮겨 심어야 합니다. 왜 성경으로 돌아가야 할까요? 왜 예수님으로 돌아가야 할까요? 신앙이란 그곳
에 심겨 있을 때만 철을 따라 열매를 맺고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기 때문입니다(시 1:3).

 

 

요한복음 7:32

32 예수에 대하여 무리가 수군거리는 것이 바리새인들에게 들린지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를 잡으려고 아랫사람들을 보내니


무리가 수군거리는 것을 듣고는 당국은 바로 행동을 합니다. 대제사장들이 여론에 밝은 사람들이었다는 것이 흥미롭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소리에 가장 밝아야 할 사람들이 사람들의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에는 관심이 없고, 삼류 정치나 하고 있는 모습니다. 게다가 아랫사람들을 수족 부리듯 하는 것을 보면 이미 영적 지도력은 상실했고, 정치적 권력만을 쥐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7:33-36

3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34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하시니
35 이에 유대인들이 서로 묻되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그를 만나지 못하리요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칠 터인가
36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한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니라


예수님은 자신이 어디로부터 왔고,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지를 명확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잠시 거할 곳과 영원히 거할 곳을 알고 이 땅을 사셨습니다. 인생 잘 산다는게 뭘까요? 인생의 뿌리를 알고, 인생의 방향을 알고, 내가 잠시 머물 곳과 영원히 돌아가야 할 곳을 아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34 절에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것이다’는 말씀은 무슨 의미일까요? 구약성경 예레미야 29 장 13 절에는 분명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렘 29:13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예수님을 찾고 찾았지만 못 만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 탄생 무렵 헤롯 왕과 그의 신하들은 예수님을 간절히 찾고 찾았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싶었습니다(마 2:8). 왜일까요? 헤롯은 자기가 계속 왕이어야 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찾아서 죽이려 했습니다. 동방박사들도 예수님을 찾고 찾았습니다. 왜 찾았습니까? 예수님을 왕으로 경배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마 2:11). 우리는 누가 예수님을 만났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왜 찾으며, 왜 만나고 싶냐는 것입니다. 내 인생, 내가 왕으로 살고자 한다면 아무리 예수님을 찾아도 만날 수 없을 것입니다. 내 인생의 진정한 왕을 찾고 있다면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만나주실 것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자기 길 가기 바쁜 사람들입니다(사 53:6). 잃어버린 양 같은 우리를 예수님이 직접 찾아오셔서 우리가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당시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유대인들에게는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고 하셨지만, 주님은 우리가 있는 곳에 우리를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우리는 내가 찾은 예수님이 아니라, 나를 찾은 예수님을 믿습니다.

 

요한복음 7:37-39

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초막절은 8일간의 축제입니다. 축제의 마지막 날은 어땠을까요? 축제의 대미를 장식하는 특별한 세레모니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호산나’를 외치며 제단을 일곱 바퀴를 돌고, 제사장들을 실로암 연못에서 물을 떠와서 제단의 동쪽과 서쪽에 뿌립니다. 이때 사람들이 “구원의 물을 우리에게 주소서”라고 외치는데 예수님이 그 옆에 서서 동시에 외치시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성대한 축제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그 안에서 갈증을 해소하고 삶의 애환이나 고난으로부터 잠시 떨어져서 숨을 쉽니다. 춤을 추고 노래하고 먹고 마시면서 삶의 활력을 충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페스티발이나 카니발의 효능입니다. 그러나 그 효과가 일시적이라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약효가 떨어지면 다시 약을 먹거나 주사를 맞아야 합니다. 때로는 더 강력한 약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성대한 축제로도, 고조된 분위기로도, 그 어떤 종교적 방법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근원적인 갈증이 인간에게 있습니다. 초막절의 축제 분위기가 사그라들면 사람들은 다시 현실의 목마름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내년 초막절 마지막날에 또 동일한 의식을 치르겠지요. 그러나 수십 번, 수백 번 반복한들 그 목마름이 해갈되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안타까움으로 외치시는 것입니다. “내게로 와서 마시라!”

 

예수님은 사마리아 수가성 우물에 물을 길으러 나온 여인에게도 동일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 4:13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요 4: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만성탈수증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우리가 흔히 심한 갈증을 느끼는 경우는 급성탈수입니다. 여름에 날이 너무 덥거나, 운동을 과하게 해서 단시간에 수분이 체내에서 빠져나가면 우리는 갈증을 느낍니다. 그러면 물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성탈수증은 체내에 수분이 부족한데 갈증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물을 마실 생각이 안드는 것입니다. 만성 탈수 증상에는 이런 것이 있다고 합니다. 소화 불량, 심한 피로감, 수면 장애, 일어날 때 머리가 어지러움, 관절이 뻑뻑하고 무릎 통증, 집중력 저하, 잦은 짜증과 우울감 등. 물이 부족해서 이런 증상이 생기는지 모르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전혀 엉뚱한 치료나 해결책을 찾아다니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 전체가 어쩌면 영적 만성탈수증을 겪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정작 부족한 것은 물인데, 대부분은 돈이 없어서 그런 줄 압니다. 힘이 없어서 그런 줄 압니다. 성적 욕구가 충족되면 될 줄 압니다.

 

짐 캐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가 부자가 되고 유명해지셔서 꿈꾸던걸 다 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그게 정답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시게 될 테니까요” 누가 SNS 에 이런 글을 써 놓은 것을 봤습니다. “돈만 있으면 다 된다고 말하는 사람은 돈이 있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인간이 참 희안하죠. 그 말에 동의하면서도 돈을 원합니다. 이게 영적인 만성탈수증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을 초청하십니다. 이 시대 전체를 초청하십니다.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하십니다. 다른 솔루션은 일시적으로는 효과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약효가 떨어지면 또 다시 찾게 됩니다. 그러면서 중독되어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류의 종교적 진통제를 처방 받으러 정기적으로 교회에 방문하기도 합니다. 목회자가 제공하는 여러 목회적 서비스들에는 진통제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경우는 마약성 진통제가 포함되어 있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두가 예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분께만 구원이 있습니다. 구원이란 더 이상 이 세상 것에 목마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옵니다. 구약적으로 생수의 강은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겔 47). 예수님은 이제 그 물이 사람의 배에서 흘러나오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배’란 인간의 본질에 대한 신체적 상징입니다. 고대인들은 배를 인간의 영혼이 깃들어 있는 곳이라고 생각 했습니다.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온다는 것은 이제 건물이 성전이 아니라, 사람이 성전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성전 삼으시고 우리 안에 항상 거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주님 안에 거하는 상호내주의 관계입니다. 내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이 내 안에 거하시는 삶에 어떤 부족함이 있겠습니까? 어떤 목마름이 있겠습니까? 의에 주리고 목이 마름이 다른 모든 주림과 목마름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킬 것입니다.

 

 

설교 후 기도

기도: 늘 하나님에게 목이 마르게 하옵소서. 더 이상 세상 것에 목 마르지 않기를 원합니다. 영원한 생명 샘물에 마른 목을 축이며, 구원을 누리는 삶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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