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부활절 설교 10개 모음 :: 부활의 의미, 부활의 첫 열매

일하는 목회자 발행일 : 2023-04-01

은혜로운 부활절 설교 10개를 공유합니다. 부활에 대한 예화가 풍부하니 부분적으로 참고하시면 좋은 설교를 준비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말씀의 꼴을 먹이기 위해 준비하시는 귀한 손길을 축복합니다. 이 설교가 많은 교역자 분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부활절 설교 모음 10개

 

부활절 설교, 설교문, 예화-1

 

부활절 설교 제목: 죽고 낳고
부활절 말씀 본문: 창세기 5:4~8, 마태복음 1:1~3

 

서론

예수님은 장례식 설교를 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 분은 죽은 이들을 모두 살려내셨기에 장례식 설교를 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은 어디든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모든 종교는 나름대로 훌륭한 교리와 윤리를 갖고 있습니다. 종교들은 인류에게 희망을 주었고 인간의 삶을 향상시켜왔습니다. 그러나 부활을 말할 수 있는 종교는 그리스도교 밖에 없습니다.


종교들은 아무리 좋은 도덕을 말하고 그리스도교를 모방한다고 해도 부활만큼은 모방할 수가 없습니다. 

 

1. 인간 세상에 죽음의 역사가 들어왔습니다.

오늘은 신 구약 두 군데를 보겠습니다. 창세기 5장을 펼치십시오. 창세기 5장은 죽음의 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5장 전체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죽었더라"입니다. 죽음 앞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없습니다. 물론 살다간 년수는 다릅니다. 오래도록 많이 살다간 사람도 있고 조금은 일찍 세상을 떠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다 죽었습니다. 욥기의 기자는 인간이 마치 곡식단과 같다고 했습니다(욥5:26). 곡식이 다 익으면 베임을 당하고 수레에 실려 창고로 들어가듯 인생도 같다는 것입니다. 베임을 당하는 것이 곧 죽음입니다. 이 죽음은 달갑지 않은 방문객이면서도 아무도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이 죽음은 어떤 뇌물도 통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사정을 보아주는 법이 없습니다. 죽음처럼 무자비한 것도 없습니다.

 어느 비석에 열 세 살에 죽은 뇌종양 아이를 그 어머니가 추억하며 써 놓은 글귀가 있었습니다. "엄마, 머리가 아파요…" 라는 제목으로 시작한 이 비석에는 젊은 어머니의 고통이 모두 담겨져 있었습니다. 이런 저런 사연들을 들어보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데 죽음은 무정합니다. 사정을 보아주는 법이 없습니다. 죽음의 위력은 대답합니다. 그 어떤 장수도 죽음의 방문을 받으면 달아날 수가 없고 한번 무덤 속으로 들어가면 다시 살아나오는 법이 없습니다. 본문에도 아담을 시작으로 모두 무덤 속에서 살아나온 자들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아무도 죽음을 뿌리치지 못했습니다. 창세기 5장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 인류의 딜레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물 복제, 인간 복제도 결국은 죽음의 공포를 이겨보려는 인간의 필사적인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예수님은 새 생명의 역사입니다.

이제는 신약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장은 예수님의 계보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1장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낳고" 입니다. 죽음에서 시작된 인간의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계기로 낳음의 역사로 바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새 생명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실 수 있었던 것은 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죄는 인간을 철저히 죽입니다. 다시 소생할 수 있는 길을 완전히 차단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속에는 신성(神性)이 들어있습니다. 그 무서운 죽음도 참 생명을 가지신 예수님을 가두어 둘 수는 없었습니다.

인간이 왜 한결같이 죽음으로 걸어가고 있으며 죽음에서 나오지 못하는 것입니까?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죄는 인간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속성이 있으며 한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곳이 죽음 저편입니다. 그러나 죄가 해결된 사람은 죽음으로 들어가기는 해도 예수님처럼 영원히 사는 또 하나의 세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나의 비유를 들어 당신의 부활을 예언하셨습니다. 요나는 불순종의 죄 때문에 물고기 배속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이야 말로 죽음입니다. 그는 죽음 속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물고기 속에서 간절히 기도하며 통회자복했을 때 그의 죄는 사라졌습니다. 죄없는 요나를 물고기는 더 이상 삼킬 수 가 없었습니다. 물고기는 요나를 토해내었습니다.

죽음이 예수님을 삼켰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은 구원을 얻을 인류의 죄를 다 뒤집어 쓴 행색입니다. 그래서 죽음이 저를 덥썩 삼켰습니다. 그러나 삼키고 보니 그에게는 죄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예수를 죽음 속에 가두어 두려고 했지만 마치 생명이 있는 싹을 그 어떤 바위도 누룰 수 없는 것처럼 예수님을 가두어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새벽에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믿는 순간 그분에게 접붙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직업 군인 생활에서 남편의 계급이 부인들의 계급이 되듯이 예수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이 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부활하며 영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인생에 살길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통해 부활을 이루었습니다. 만약 그분께서 죽음이 없었다면 부활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영원한 소멸도 영영한 이별도 아니라 부활에 이르고 천국에 이르게 하는 통로, 터널인 것입니다.

카잔차키스는 그의 책 <두려움보다 더 큰 부끄러움은 없다>에서 죽음을 "늙은 사기꾼"이라고 했습니다. 죽음은 인생을 향해 엄청난 사기를 친다는 것입니다. 죽음은 영영한 이별이라고. 이런 사기에 걸려들어 인간은 죽음 앞에서 끝없이 무너지며 괴로워하며 고통당하는 것입니다. 카잔차키스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는 청년 시절, 죽음을 두려워했습니다. 어느 날 자신에게 죽음의 공포를 없애주려고 수도사가 공동묘지로 데리고 갔습니다. 무덤 하나가 비어 있었습니다. 수도사는 그를 무덤 속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비어있지요? 그러나 곧 차게 될 거예요. 이 무덤의 임자는 나요" 거기에 비석이 있었습니다. "한번 읽어보겠소?" 이런 비문이 있었습니다. <이봐, 죽음아 난 네가 두렵지 않다!> 다 읽고나자 수도사는 카잔차키스를 향해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죽음은 노새와 마찬가지요. 나를 신에게 데려다 주려 오는 노새에 불과해요" 그는 죽음을 노새라고 보았습니다. 노새는 사막을 지나는 데 꼭 필요한 운송수단입니다. 죽음은 신에게 데려다 주는 좋은 하인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러기에 어느 목사는 임종 직전에 "하나님이 나를 영접하러 나오셨다!" 며 환희로 가득 찬 얼굴로 떠나갔습니다.

몽테뉴는 "죽음의 준비는 자유의 준비이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죽어야 할찌를 안다면 그때부터 참된 자유가 있을 것입니다.


결론

영국의 문호 루이스에게는 살이라도 베 주고 싶은 친구가 있었습니다. 찰스 윌리엄스였습니다. 이 친구가 먼저 사망했습니다. 조사(弔詞)에서 루이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천국은 무척 가까워졌습니다. 멀리 생각되던 천국이 이젠 이웃집이 되었습니다. 그곳에 내 친구 찰스가 있으니 얼마나 가까운 곳입니까?" 1년 후에 그의 아내 조이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조이는 유대인 이혼녀로 루이스가 노총각 때에 비밀결혼을 했습니다. 루이스 부부는 금실이 좋기로 유명했습니다. 루이스는 그 날의 일기에 이렇기 기록해 놓았습니다. "이제 천국은 내 집처럼 가까워졌다. 조이가 있고 찰스가 있으니 그곳은 바로 내 집이 아닌가?" 우리 모두에게 죽음은 정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는 부활이 보증되어 있기에 더 빛나는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부활설 설교문-1 다운로드

위에 올려드린 부활절 설교문을 한글파일(hwp)로 올려드립니다. 필요하신 분께서는 아래 버튼을 클릭해서 다운로드 받아주세요.

 

🔻설교문 한글파일(hwp) 다운로드🔻

부활절 설교.hwp
0.06MB

 

 

부활절 설교, 설교문, 예화-2

 

부활절 설교 제목: 죽음을 멈추신 분
부활절 말씀 본문: 누가복음 7:11~17 

 

서론

강물은 쉬임없이 아래로 아래로 흘러갑니다. 강물이 있는 동안은, 만물이 존재하는 동안은 강물은 계속 흘러 내려갈 것입니다. 인간 세상에 죽음이라는 것이 들어온 이래로 죽음은 끝없이 계속되어 왔습니다. 영웅호걸도 천하장사도 죽음이라는 상대방은 뿌리치지 못했습니다. 죽음 만치 인간을 원통하게 한 것도 없을 것이고 죽음 만치 인간을 공포로 떨게 한 것도 없을 것입니다. 사람이 사는 세상에 가장 큰 두려움이라면 바로 죽음이요 가장 큰 슬픔도 죽음이요 가장 큰 절망도 죽음일 것입니다.


1. 나인성에 죽음의 행렬이 있습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죽음을 향해 행진합니다. 우리가 살아있다 하지만 천국처럼 살아본 날들이 도대체 몇 날이 되겠습니까? 어떤 이는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누구의 마음도 찢어지지 아니하고 지내는 날이란 단 하루도 없도다" 로마의 시인 버질은 그의 시에서 "만물에는 눈물이 있도다"라고 읊고 있습니다.

마음을 가장 찢어지게 하는 것, 가장 많은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은 죽음입니다. 어버이의 죽음, 벗들의 죽음, 교우들의 죽음. 심지어는 자녀들을 앞에 내세워야 하는 죽음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언젠가는 내 차례가 되어 남의 손에 떠받치어 죽음의 길을 떠납니다. 누구나 가는 그 길, 그러나 가는 그 길은 꼭 같지 않습니다. 남을 지겹게 하다 후련하게 가는 죽음의 길이 있고 남을 괴롭히다가 가는 저주스런 죽음도 있습니다.

모든 죽음이 비애로운 것이기는 해도 오늘 여기에 나오는 그 죽음은 더욱 애처로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청년이었고 독자였고 과부의 아들이었습니다. 누구나 안됐다 싶은 죽음이었습니다. 이런 죽음이니 그 어머니가 얼마나 구슬프게 울었겠습니까? 하지만 인간적으로는 불쌍하지만 그것은 누구나 걸어야 하는 운명의 길이었습니다. 죽음이 사정을 봐준다면 죽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죽음은 인정사정이 없고 그래서 인간 세상에서의 죽음은 더욱 비애로운 것입니다. 


2. 누구도 그 행렬을 막을 수 없습니다.

나인성 밖으로 나가는 죽음의 행렬. 그 행렬을 막아설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군대의 힘? 돈의 위력? 권력? 아무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마음을 움직이는 것 중에 눈물만큼 강한 게 어디 있겠습니까?

그 중에서도 외아들의 죽음, 자식을 잃은 어머니가 구슬피 울어대는 그 죽음만큼 가슴을 찢어놓는 절절한 눈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눈물마저 죽음을 막을 수 없었다면 어느 군대가, 어떤 사정이 그 죽음을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 죽음을 막아보기 위해 종교가 나오고 과학이 나옵니다. 고래로 미이라 용법, 불사약, 불로초를 찾아 헤매었지만 아직도 이 죽음의 행렬을 막았던 자는 없습니다.

 

여러 종교의 교주들.
*석가모니-자식을 잃은 어머니에게. "참으시오" 운명인 줄 알라는 체념을 말했습니다.
*공자-"땅의 일도 다 모르겠거늘 어찌 내세의 일을 알랴!"고 했습니다. 
*죽어 가는 무수한 사람들을 살려주었던 고명한 의사들까지도 정작 자신에게 죽음이 찾아왔을 때는 저항하지 못하고 체념상태에서 그 죽음의 행렬 속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우리도 그 행렬에 있어보았던 사람들입니다.
*부모의 시신을 앞세우기도 했고
*혈육의 죽음의 행렬에서 슬피 울며 뒤따르기도 했고
*먼저 떠나가는 교우들의 죽음에서 비애에 잠겨보기도 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우리가 그 행렬의 가운데 있을 것이며 내 자녀가 행렬의 앞에서 우리의 사진을 들고 앞장서는 날들이 올 것입니다. 아무도 그 행렬을 막을 수 없습니다.


3. 예수님은 죽음을 막아섰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행렬을 보셨습니다. 젊은 아들을 앞세우고 있는 그 어머니, 일찍이 홀로 되어 그 아들 하나 믿고 수절하며 살아왔는데 그 아들이 죽었습니다. 그 죽음 앞에서 울고 있는, 관을 따라가며 그 앞길을 막고 있는 그 어머니, 그러나 그 어머니가 막아서기에는 죽음은 너무 세력이 강합니다.

창과 칼로도 막을 수 없었던 그 죽음의 길을 그 어머니가 무슨 재주로 막아설 수 있는 것입니까? 그러기에 여인은 우는 것으로 그 원통함을 토해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아무도, 아무도 그 어머니를 달랠 줄 수가 없습니다. 달래주기에는 너무도 큰 슬픔이었기에, 달래줄 사안이 아니었기에 사람들은 그 여자와 동행하는 것으로 여인에 대한 힘과 격려를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여인의 앞으로 나선 분이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가까이 가셔서 울지 말라고 위로하셨습니다. 죽음 앞에서 무슨 위로가 필요합니까? 누가 그 죽음의 행렬에 서 있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습니까? 그냥 우는 자와 함께 우는 것이 위로의 전부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위로하셨습니다. 그분은 죽음을 물리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위로할 자격이 있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관 앞으로 가셔서 관을 멈추시고 명령하셨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마치 어머니가 잠든 아이에게 일어나라 아침이 되었다 라고 깨우듯이 주님에게는 간단한 일이었습니다. 인류의 영원한 숙제가 주님에게는 간단한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청년은 살아났습니다. 살아난 청년은 다시 성안으로 들어옵니다. 죽음의 행렬이, 원통함과 비애와 통곡과 안타까움이 있었던 그 죽음의 행렬이 이제는 부활의 행렬이 되어 감격하며 기뻐 눈물 흘리며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그들은 돌아서고 있습니다. 죽음의 행렬이 산 자의 행렬로 되돌아서고 있는 대 장관이 펼쳐진 것입니다.

 

인류 역사에 죽음을 거슬린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은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믿는 자는 산다!"고 하십니다. 이 사실을 믿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결론

L.A의 스포츠방송국에서 재미있는 조사를 했습니다. 스포츠 시청자들은 결과를 이미 알고 있는 녹화경기를 어느 정도 시청하느냐 하는 조사였습니다. UCLA 대학을 응원하는 농구 팬이 많아서 이긴 경기를 이틀 후에 재방영하였습니다. 그러나 시청률은 생방송과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물론 진 경기를 이틀 후에 방영하면 볼 사람이 없었겠지요. 그러나 자기편이 이긴 경기이기에 조마조마한 긴장이나 불안 없이 마음 푹 높고 볼 수 있어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죽은 너머에 부활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기에 죽음 앞에서도 장래의 부활과 영광을 알기에 잠시잠간 동안의 이별을 슬퍼할 뿐이지 불신자들처럼 영영한 이별의 절망으로 지나치게 슬퍼하지 말것을 바울은 당부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들의 행렬, 산 자의 행렬, 어느 쪽의 행렬을 따르고 있습니까? 부활의 행렬에 동참한 여러분들을 축하합니다.

 

부활설 설교문-2 다운로드

위에 올려드린 부활절 설교문을 한글파일(hwp)로 올려드립니다. 필요하신 분께서는 아래 버튼을 클릭해서 다운로드 받아주세요.

 

🔻설교문 한글파일(hwp) 다운로드🔻

부활절 설교-2.hwp
0.06MB

 

 

부활절 설교, 설교문, 예화-3

 

부활절 설교 제목: 부활의 의미

부활절 본문 말씀: 고린도전서 15:20~22

 

서론

교회 마당 앞에 은행나무를 두 번이나 옮겨 심었습니다. 교회 마당에 왔으니 이제는 죽을 때까지 떠나지 않으리라 생각했을 텐데 두 번이나 옮기게 되어서 정말 불쌍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싹이 트나… 했는데 어제 보았더니 싹들이 돋아났어요. 이번 부활절에 은행나무의 싹은 그 어떤 것보다 부활을 증거하고 있고 부활의 능력과 희열을 저에게 안겨주었습니다.


유럽교회가 한창 부흥하다가 몰락하기 시작한 큰 계기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성경에서 증명하고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역사적으로 과학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라는 의문을 던지면서 신체적인 부활은 없다, 단지 우리가 예수님의 정신대로 살면 예수님은 부활하신 것과 같은 것이다, 라는 주장들이 유행처럼 번지면서 유럽교회는 몰락했습니다. 그 선두에 섰던 사람 중의 하나가 알베르토 슈바이처입니다.

 

부활은 십자가와 함께 기독교의 기본을 이루고 있는 교리입니다. 기독교의 대적자들은 부활을 없애기 위해 별의별 수단을 동원했습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의 부활에 기둥을 세워놓았기에 부활이 없으면 기독교는 그 날로 무너져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부활은 갈수록 더 견고해 지고 인간에게 희망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은 부활의 의미에 대해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1. 부활은 하나님이 계심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지금까지 수천 년, 수억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죽었다가 다시 살았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죽음에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누구도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처음부터 죽음과 부활을 전제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땅속에서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누군가 그분을 살리신 또 다른 존재가 있다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은 아무 것도 못합니다. 손가락 하나 깜짝할 수 없고 몸을 움직일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살아나셨다면 인간 예수님께서 스스로 살아 나셨겠습니까? 누군가 살아나게 하신 분, 부활시켜 주신 분이 존재합니다.

 

그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가리켜서 부활의 하나님이라 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해 주는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2. 부활은 예수님이 옳으심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자신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은 구세주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믿는 자는 죄사함을 통한 영생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한편에서는 예수님이 사기꾼이며 신을 모독한다고 핍박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예수님의 사상이 세상에 전파되는 것을 막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예수님께서는 부활한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두 주장이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사기꾼인가? 아니면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신가? 그 판결은 누가 판단해 줄 사항이 아닙니다. 그 판결은 간단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다고 공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공언을 하지 않았다면 우리조차도 지금까지 예수님에 대한 판단이 확실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부활을 공언하셨습니다. 일은 간단하게 된 것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지 못하시면 대적자들의 주장이 옳은 것이고 부활한다면 예수님의 주장이 옳은 것입니다. 인류 최대의 대결이 벌어졌습니다. 부활은 인간 세상에 흔한 것이 아닙니다. 절대로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만약 부활한다면 그분의 주장은 진실한 것이고 부활하지 못한다면 그분은 사기를 친 것입니다.

 

2천년 전, 오늘 아침, 판정이 났습니다! 그분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진리였음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부활 그 한 사건만으로도 그분의 모든 것은 진리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부활이 믿어지거든 그분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다 믿어야 합니다. 어느 것은 믿고 어느 것은 믿지 말아야 하는 그런 종류가 아닙니다. 부활은 예수님의 모든 것이 진리이고 진실이었음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3. 부활은 죽음이 죽음을 이긴 것임을 증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으셨습니다. 그분은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죽으심을 통해 죽으심을 정복한 것입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하는 것처럼 죽음을 잡기 위해 죽으심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모두 죽습니다. 왜 죽습니까? 죽음이 없이는 그 죽음을 정복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범죄한 인류에게 사망이 없었다면? 아담이 지금까지 살아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그분들을 모시고 섬기느라 인류에게는 진보와 행복이 없습니다. 죽음을 통해서만 죽음은 정복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죽음 앞에서 지나치게 떨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 죽음을 잡기 위해서 죽음으로 가는 것입니다. 죽음으로 가지 않으면 인생에게 죽음을 정복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본 회퍼 목사님은 웃으면서 마지막이 아닌, 새로운 삶의 길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4. 부활은 우리의 선택이 진실한 것임을 증명해 줍니다.

세상에서는 자기의 전공분야가 있고 자기가 생명을 바쳐서 일하는 것이 있습니다. 마르크스와 그의 동조자들은 공산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혈맹을 맺었고 싸웠습니다. 김일성과 그 동지들은 이 땅에 공산사회를 만들려고 헌신했습니다. 히틀러의 동지들은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을 전 세계에 과시하기 위해서 싸웠습니다. 히틀러의 오른팔인 허스는 46 넌을 슈퍼다우 감옥에서 보냈습니다. 그는 사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다시 태어나도 히틀러의 부하가 되겠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싸우고 헌신해도 진정한 공산사회를 만들지 못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을 뿐입니다.

우리는 그 어떤 것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신도가 된 것을 감사합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에 최고의 행운이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우리가 부활을 몰랐다면 어떤 희망이 있고 위로가 있겠습니까?


결론

얼마 전 아들을 떠나보낸 우리교회 심방 여전도사님이 저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저의 아들은 하나님 품안에서 이 세상의 힘들었던 무거운 짐을 다 내려놓고 편히 쉬고 있을 것이니 너무들 슬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 아들이 간 것은 어미로서 뼈를 깎는 아픔이지만  내게 아들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병들고 상처받은 자들을  내 아들처럼 품고 가라는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그 사명 감당하는 교역자가 되겠습니다. 24년 동안 아들 때문에 행복했었습니다. 저의 아들 마지막 가는 길에 애써주시고 베풀어주신 사랑에 다시 한번 감사 드립니다.>

부활이 없었다면 어떻게 이런 고백이 나오겠습니까? 평생을 부활신앙에 의지하며 산다는 것은 얼마나 든든한 일입니까? 부활의 신앙을 굳게 붙잡을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오늘의 찬송은 바로 이 신앙고백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부활의 은총이 여러분들에게 임하기를 기원합니다.

 

부활설 설교문-3 다운로드

위에 올려드린 부활절 설교문을 한글파일(hwp)로 올려드립니다. 필요하신 분께서는 아래 버튼을 클릭해서 다운로드 받아주세요.

 

🔻설교문 한글파일(hwp) 다운로드🔻

부활절 설교-3.hwp
0.05MB

 

 

부활절 설교, 설교문, 예화-4

 

부활절 설교 제목: 부활의 첫 열매

부활절 말씀 본문: 고린도전서 15:20

 

서론

오늘 아침, 발인예배를 드렸습니다. 비단 그분들만 아니라 사랑하는 이를 먼저 떠나보내며 오열하고 관을 막아서며 억지 쓰는 유족들을 바라볼 때면, 그리고 그 떠나가는 장례행렬을 힘으로라도 막아보려고 용쓰는 모습을 볼 때면, 그래서 눈물로 몸으로 막을 수 있는 죽음이라면 유족들과 함께 온몸으로 막아보고 싶은 바램이 간절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1. 인류역사에 부활의 열매가 없었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인정도 사정도 없이 무정한 불청객입니다. 4대 5대 독자들도 느닷없이 데려가며, 어린것들의 어미를 사정없이 데려가 버립니다. 죽음은 어떤 영웅도 뿌리칠 수 없을 만큼 강력합니다. 죽음이 얼마나 무서운 지 죽음의 방문을 받은 사람은 거절하지 못하고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소처럼 끌려서 가야했습니다. 지금껏 그 누구도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무덤의 문은 너무 강하고 견고해서 누구나 한번 그 안으로 들어가면 나온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가죽옷을 해 입히며 영생을 약속하셨습니다. 아담은 하와의 이름을 "생명"이라 지었습니다. 영원히 죽지 않을 생명입니다. 그때부터 인생은 영생을 꿈꾸었고 영생하는 나라를 희망했습니다. 영생해버리면 죽음을 보지 않아도 되고 사랑하는 이들과 영영 이별하는 아픔도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에셀나무(상록수)를 심으며 영생하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수 있었던 것은 영생하시는 하나님, 다시 죽음에서 일으켜 세우실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죽으면 살아날 줄 모르고 죽음이 얼마나 깊은 잠인지 누우면 일어날 줄을 몰랐습니다.

사라가 127세로 죽었을 때, 아브라함은 아내를 잃고 "슬퍼하며 애통하다가 그 시체 앞에서 일어나"(창23:2) 장사 지내었다고 했습니다. 이삭은 "모친 상사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창 24:69)고 했습니다. 사라의 죽음 앞에서 남편은 남편대로, 아들은 아들대로 상심한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장차 오실 예수님을 멀리서나마 바라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사람의 영생을 믿었습니다. 죽음 이후에도 분명 다시 만난다는 것을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부활 이전의 사람들이기에 부활의 모습이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를 몰랐기에 더욱 더 상심했을 것입니다.

 

2. 예수님은 부활의 열매가 되셨습니다.

우리교회 집사님이 15년 정도 아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기적적으로 아이를 얻게된 부모들이 너무 기뻐서 아이 이름을 "기쁨"이라 지었습니다.

 

만약 아담과 하와가 15년 동안 아이가 없었다면 아이의 출생을 미심쩍어 했을 것입니다. 아이는 태어날 때 어디로 나오는 것이며 어떻게 나오는 것이며... 등등을 몰랐을 것입니다. 지구상에는 그들 두 사람밖에 없었고 아이를 낳는 것을 구경해 본적도, 들어본 적도 없기에 아이가 생긴다는 것도 알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와가 가인을 낳았습니다. 아주 잘 생긴 아들입니다. 두 눈, 귀, 머리카락, 열 손가락, 열 발가락… 그것은 인류역사상 첫 출산이었고 출생의 첫 열매가 되었습니다. 이제 아담은 출산의 첫 열매가 되는 가인을 보면서 출생의 신비를 체득했습니다. 앞으로 누가 뭐라던 아담은 아내의 출산의 능력을 믿을 것입니다. 그리고 가인이 나왔기에 그 다음 자식도 출산할 것으로 믿었습니다.

 

가인이라는 아들의 첫 열매는 이처럼 모든 사람에게도 출산의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바울이 지금 고린도교인들을 상대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21절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아담의 죄로 사망이 왔습니다. 아담의 죄는 두 가지를 건드려 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아서 영원히 사는 생명". 죄가 영생할 수 있는 기능을 건드려 버리니까 아담의 후손들은 하나 같이 죽게되었고 마치 유산되는 아기들처럼 죽은 후에는 되살아나지 못했습니다.

 

아담 이후의 인류는 사람들이 죽어 가는 것을 볼 때 믿음의 사람들조차 ‘부활은 있는 것일까?' `사람이 부활한다면 어떤 식으로 하는 것일까?' 궁금했지만 자기의 생애에 부활의 열매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활을 의아스럽게 여기며 한편으로는 기대도 하면서 죽어갔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죽었고 일어나지 못했는데 예수님께서는 왜 부활할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에게는 죄가 없었습니다. 그분은 동정녀의 몸에서 탄생하셨기에 인간의 모든 육신 그대로 입고 나오기는 했지만 죄와는 상관없이 세상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죽음이 삼켰고 돌무덤이 안에 가두었습니다. 인간 역사 속에 들어왔다 퇴장한 모든 사람들을 삼켰던 죽음이 예수님을 삼킨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블랙홀 속에 빠져 들어간 것입니다. 죽음의 블렉홀은 예수님은 모든 인류의 죄를 다 감당하셨기에 죄인 중의 죄인의 모양이었고 그 죄의 맛스런 모양을 보고 덥석 삼켰지만 완전히 삼킬 수는 없었습니다. 삼켜보니 죄가 없는 분이었습니다.

죽음은 죄가 없는 사람은 삼킬 수가 없습니다. 마치 큰 고기가 요나를 삼켰지만 삼킬 수 없어 뱉어내었던 것처럼 죽음도 예수님을 뱉어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음에서 돌아왔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었습니다.

 

이제야 사람들은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육신의 죽음은 열매 맺지 못하는 꼭지처럼 땅에 묻히고 떨어져버리는 게 아니라 예수님처럼 다시 살아날 영생의 육체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모든 사람들이 부활하심을 보여준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의 첫 테이프를 끊었으니 우리도 부활할 수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신경으로 이렇게 고백합니다.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3. 부활의 희망으로 고난을 견디어냅시다.

어떤 단체에서 기독교인들을 상대로 설문을 작성했습니다. "신앙이 언제 가장 힘이 되었는가?" 그 답은 죽음 앞에서였다고 합니다. 평상시에는 신앙이 없어도 견딜 수 있겠는데 죽음 앞에서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만큼 죽음의 쇼크가 강하다는 것이겠지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온갖 고초 당하시고 조롱 당하셨습니다. 그분은 죽어서 장사되었습니다. 그분의 죽음은 우리의 죽음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죽게되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운명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창조의 권능을 갖고 계신 분이십니다. 죽음이 그의 손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분이 죽음의 권세 속에 놓여있습니다. 죽음이 그를 삼켰고 그분은 무력하게 보이리만큼 체포당하고 죽어 가셨습니다.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이며 견디기 어려운 일입니까?

 

우리는 두 전직 대통령이 감옥에 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분들은 권력을 휘두르던 분들입니다. 자기들 말 한마디로 사형에 처할 사람들도 특사로 면죄해 줄 수 있는 권력을 쥐었던 분들입니다. 그런데 그들 자신들이 감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 얼마나 못 견디었을까요? 일반 잡범이나 특수 사범들의 입장과는 다릅니다.

 

예수님 역시도 죽음은 너무 견디기 힘든 고통입니다. 영원 전부터 지금까지, 지상에 내려오신 33년 동안을 잠시도 하나님에게서 그 시선이 떠나있지 않으셨던 분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에게는 너무도 힘든 3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무덤 속에서 잘 견디셨습니다. 부활을 아셨고 제 3일째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일으키실 부활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무덤에 묻히자 제자들은 절망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그들은 너무 힘들었고 두려웠고 허망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움 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죽음이 주는 가장 큰 고통은 바로 그리움입니다. 제자들은 죽음의 절망을 부활의 소망으로 견디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부활의 첫 열매를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의 꽃으로 환하게 그들 앞에 나타나신 것을 보았습니다.

어느 곳에 꽃 파는 할머니가 살았습니다. 그 할머니는 항상 웃는 얼굴로 꽃을 팔았습니다. 누가 꽃 한 송이를 사며 말했습니다. "할머니 너무 행복해 보이네요?". "행복하다마다요. 만사형통이랍니다". "근심 걱정을 잘 처리하시나보지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던 날은 온 세상이 가장 슬펐던 날입니다. 그러나 사흘만에 부활하셨어요. 기쁜 날이 되돌아온 것이지요. 그래서 나도 어려운 일이 있으면 사흘만 꾹 참고 기다려봅니다. 그렇게 기다리다보면 신가하게도 모든 일이 제대로 풀리고 제 자리로 돌아온다오. 이 지혜가 나를 웃도록 만들고 행복하게 만든다오"

 

그래요!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도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그렇게 운다는 데 예수님의 부활, 그것도 인류의 첫 부활을 얻기 위해서는 3일 간의 죽음의 고통, 선생님을 잃어야 하는 고통이 요구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오늘 여러분의 삶이 힘드시지요? 예수님처럼, 그 꽃 파는 할머니처럼 3일만 참으세요. 3일만 참고 기다리는 심정으로 살아가세요. 장사한 지 3일만에 부활의 기쁨을 보았듯이 오늘 고통을 잘 이겨내는 이들은 새로운 부활의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결론

영국의 설교가 생스터는 고령에다 전신마비로 말도 제대로 못하고 누워서 살았습니다. 부활주일이 돌아왔을 때 그는 딸에게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딸아, 오늘이 부활절이구나. 부활절 아침에 일어나서 `예수가 부활하셨다!'  한번 큰 소리로 외쳐보고 싶었는데 아무리 부르짖어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구나. 기가 막힐 것 같아. 그러나 딸아, 이보다 더 기가 막힐 일이 있다. 그건 목소리가 있는 데 `예수 부활하셨다!' 소리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예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어려운 일이 왔을 때 부활신앙으로 부활의 소망으로 인생의 문제들을 풀어 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부활하신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부활설 설교문-4 다운로드

위에 올려드린 부활절 설교문을 한글파일(hwp)로 올려드립니다. 필요하신 분께서는 아래 버튼을 클릭해서 다운로드 받아주세요.

 

🔻설교문 한글파일(hwp) 다운로드🔻

부활절 설교-4.hwp
0.07MB


 

 

종려주일 설교 - 왕이 나귀 새끼를 타시다(마태복음 21:1-11)

이번 주는 종려주일입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주님을 기억하며 "호산나" 찬송하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종려주일 본문과 설교를 공유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

selfcar.tistory.com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