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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추감사절 설교 10개 모음 :: 첫 열매를 주목하라, 감사의 기적!

일하는 목회자 발행일 : 2023-06-23

맥추감사절 설교 모음 10개

맥추감사절 설교 :: 첫 열매를 주목하라!(신 26:1-11)

어려운 소식이 계속 들려옵니다. 더 어려운 일이 생길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때에 우리는 감사주일을 지킵니다. 그 자체가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와도 감사가 되면 산다는 것입니다. 위기의 때 우리가 살 길은 감사입니다. 그래서 오늘 맥추감사주일이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한 일인 것입니다.

 

오늘 감사주일은 너무나 특별한 감사주일입니다. 첫 열매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첫 열매로 감사하라, 그것도 영원한 절기로 삼으라” 하셨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왜 첫 열매로 감사해야 하는지 모르기에 지키지 않습니다. 맥추감사주일을 소홀히 하는 교회들도 많아지고 있습니다.

 

제가 첫 열매 감사에 관심을 가진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목사가 된 이유가 부모님과 할머니의 첫 열매 감사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첫 아들이니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겐 말할 수 없는 부담이었고 멍에와 같았습니다. “도대체 첫 열매는 왜 하나님께 드려야 하나?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목사만 되어야 하나?” 그 궁금함 때문에 첫 열매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성경을 보니 엄청난 문제임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정말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문제였던 것입니다.

 

첫 열매 감사가 중요한 것은 첫 열매는 모든 열매를 대표하는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정말 믿으면 첫 열매로 감사하게 되고 하나님을 진정 믿지 않으면 첫 열매 감사는 소홀하게 될 수밖에 없고 그 결과는 너무나 심각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서 깨닫고 회개한 중 하나가 첫 열매 감사를 소홀히 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 하나님께서 애굽에 내린 열 가지 재앙 중 마지막 재앙이 애굽 사람 집마다 장자를 다 죽인 것입니다. 이 일로 바로가 항복했습니다. 장자가 첫 열매인데 장자 죽었다는 말은 가족 모두 죽은 것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은 양의 피로 문을 칠하였기 때문에 장자가 죽는 재앙에서 보호받았습니다. 이것을 기념하여 지키는 절기가 유월절입니다.

 

이 유월절 사건 이후 이스라엘의 장자들은 다 하나님의 것이 되었고 첫 아들은 하나님께 바쳐야 했는데, 그 방법이 레위인을 구별하여 세우신 것입니다. 레위인들이 이스라엘의 모든 장자를 대신하여 성전에서 일하였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치는 십일조와 첫 열매를 가지고 살도록 하였습니다.

 

바벨론 포로 기간 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깨달은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첫 열매 감사를 소홀히 하였기에 레위인이 먹을 것이 없었고 레위인들이 성전 사역을 소홀히 하니 이스라엘의 신앙이 무너져 바벨론에 포로로 가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루살렘에 귀환할 때 결단 중 하나가 ‘이제부터는 첫 열매를 드리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느 10:35 해마다 우리 토지 소산의 맏물과 각종 과목의 첫 열매를 여호와의 전에 드리기로 하였고

여러분, 우리에게도 첫 열매 감사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첫 열매를 주목해야 합니다.

 

계명에도 가장 중요한 계명이 첫째 계명입니다.

마 22: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사랑에도 처음 사랑이 중요합니다. 절대 잃어서는 안 됩니다.

계 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모든 민족이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첫 열매로 삼으셨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삼키는 자는 망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렘 2:3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위한 성물 곧 그의 소산 중 첫 열매이니 그를 삼키는 자면 모두 벌을 받아 재앙이 그들에게 닥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수님을 부활의 첫 열매라 하셨습니다.

고전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하나님께서 첫 열매로 보신다고 했습니다.

약 1:18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여러분이 첫 아들이 아니라도 상관없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 안에서 첫 열매입니다.

계 14:4에 나오는 십사만 사천의 성도들이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드리는 첫 열매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소유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맥추감사절기에 성령을 주시기로 정하셨고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였습니다. 이제 첫 열매가 얼마나 중요한지 감이 잡히십니까? 첫 열매가 중요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지 않으면 첫 열매에 대하여 소홀하게 됩니다. 첫 자녀를 잘 기르기가 힘듭니다. 부모로서 미숙하고 안정되지 못한 때이기 때문입니다. 첫 수입, 첫 월급, 첫 수확 다 어려운 때입니다. 첫 것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분명한 믿음이 없으면 첫 열매를 급한 곳, 자기가 필요한 곳에 쓰게 됩니다. 첫 열매 감사가 분명해야 합니다. 첫 열매 감사 없이 풍성한 추수 감사는 없습니다. 그러나 단지 풍성한 추수 감사를 위하여 첫 열매 감사를 드리자는 것이 아닙니다. 첫 열매를 보는 눈이 열려야 엄청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지난 주간 목회자 제자훈련 세미나가 있었습니다. 마친 다음 날 새벽 기도하는데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부흥이 시작되는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번 목회자 제자훈련 세미나는 제가 강사가 아니고 부목사님들이 강사였습니다. 그런데 부목사님들이 시간 시간 한결같이 눈물로 강의를 하였습니다. 그것이 그저 은혜로웠다 하며 지나갈 일이 아니라 생각됩니다. 예사로운 일이 아닙니다. 한 두 사람도 아니고 어떻게 모든 목사님들이 눈물로 말씀을 전할 수 있었을까요?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전에는 한 두 목사님이 그런 경우는 있었지만 이번처럼 모든 목사님들이 눈물로 말씀을 전했던 적은 없었습니다. 그동안 공동체가 함께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는 역사를 위하여 기도해 왔는데 공동체가 함께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목사님들이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왔기 때문이라 깨달아집니다. 무슨 그런 지나친 말씀을 하십니까? 말할 분도 있을 것입니다.

 

왕상 18장에 보면 엘리야가 3년 반 동안 비가 오지 않는 이스라엘 땅에 비를 내려 달라고 기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일곱 번 간절히 기도한 다음 수평선 위에 손바닥만 한 구름이 떠올랐습니다. 그것을 본 엘리야는 호들갑을 떱니다.

 

아합 왕에게 홍수가 날 터이니 얼른 마차를 타고 산에서 내려가라고 하였습니다. 엘리야가 왜 이리 하였을까요? 하나님이 역사하신 구름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신 구름이라면 비록 손바닥 만해도 폭우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첫 열매가 이와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 왜 성령의 충만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역사하시는 성령님께 합당한 반응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임신을 확인하러 갔다가 초음파 검사에서 태아의 모습이 보일 때, 와!

심장 마비가 온 사람, 응급조치를 하는데 맥박이 다시 뛰기 시작했을 때, 와!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에 대하여는 왜 그렇게 반응하지 않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성령의 역사에 대하여 요 4:13에서는 샘물에 비유하셨다가 요 7장에서는 생수의 강이 되리라 하셨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크냐 작으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작아 보여도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다면 이미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 작다고 무시하니 그 다음 열매가 없는 것입니다.

 

저는 설교를 준비할 때 주님이 주시는 영감의 말씀이 하나라도 깨달아지면 “주님이 역사하시는구나!” 믿습니다. 집회 시간에도 주님의 역사를 살펴봅니다. 준비기도 시간이라도, 성령의 감동으로 기도하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찬양하는 시간에 성령의 감동으로 찬양하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보이면 “주님이 역사하시는구나!” 감사하며 담대하게 주님을 증거합니다.

 

첫 열매 감사절, 대단한 믿음입니다. 진정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자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맥추감사절은 강력한 믿음의 도전입니다. 믿음으로 살리라는 결단입니다. 하나님께 완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것이 첫 열매인지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혹시 첫 열매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을 놓친 것은 없을까요? 그래서 새해가 시작되고 6개월이 지난 후 맥추감사주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런 의미가 있는 맥추감사주일 헌금으로 분립개척교회를 세워왔습니다. 맥추감사주일에 가장 합당하고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일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평생 첫 열매를 주목하며 첫 열매로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그것은 풍성한 추수감사절을 지키게 해 줍니다, 뿐만 아니라 부활 신앙으로 살게 하며 성령충만한 삶을 살게 합니다.

 

성찬은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은혜의 시간입니다.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님께서 나의 생명, 나의 주님임을 고백하는 시간입니다. 첫 열매로 감사하는 제가 우리 가정의 진정한 부활 신앙의 첫 열매가 되게 하소서. 성령으로 충만하여 부흥의 불씨가 되게 하소서. 불신 세상에서 하나님의 증인이 되게 하소서. 기도하며 성찬을 받겠습니다.

 

 

맥추감사절 설교 - 첫 열매를 주목하라!

 

맥추감사절 설교-첫 열매를 주목하라.hw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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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추감사절 설교 :: 첫 열매를 보는 눈이 열려야 한다!(출 23:16)

 

 

오늘은 맥추감사주일로 드립니다. 맥추감사주일이 추수감사주일과 다른 점은 맥추감사주일은 첫 열매, 첫 수확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 추수감사주일은 한 해 동안 하나님이 주신 전체 열매에 대한 감사를 드리는 날입니다.

 

어떤 분들은 그런 의문을 가지실 수 있어요. 예수님께서 이미 십자가를 지셔서 율법을 완성하셨는데 우리가 구약 절기를 왜 지켜야 하나요? 네 맞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셔서 율법을 완성하셨지요. 그러나 율법을 완성하겠다고 하셨지 없앤다고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율법의 완성은 결국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다시 말해 맥추감사주일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주신 주일입니다. 물론 우리가 구약의 율법처럼 절기를 지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에 기록하신 절기의 그 핵심 의미는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합니다.

성경의 절기는 우리가 흔히 지키는 기념일과는 다릅니다. 보통 기념일은 사건이 먼저 일어나고 기념일이 생깁니다. 하지만 성경의 절기는 반대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절기를 만드시고 그 다음에 사건이 벌어집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유월절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을 향한 10번째 장자의 재앙 때에 어린양을 잡아다가 문설주에 피를 바르라고 하셨지요. 유월절 제정을 말씀하시고 그 다음에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장자의 죽음에서 건져졌고 애굽에서 나오게 됩니다. 자유인이 된 것이지요. 이제 우리는 유월절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인 어린양의 죽음,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기념하여 고난주간을 지킵니다. 절기의 형태는 사라졌지만, 그 의미는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유효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맥추감사절은 어떻습니까? 이것 역시도 하나님이 먼저 절기를 제정하시고 그 다음에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오늘 본문 출애굽기 23장에 보시면 14절부터 하나님께서 세 개의 절기를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무교절이고, 두 번째가 16절에 나오는 맥추절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가 수장절이라고 해서 가을에 한 해 동안 수고하여 이룬 것을 거두어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맥추절은 무엇인가? 16절에 보니,

 

[출 23:16] 너희는 너희가 애써서 밭에 씨를 뿌려서 거둔 곡식의 첫 열매로 맥추절을 지켜야 한다...

 

“너희가 애써서 밭에 씨를 뿌려서 거둔 곡식의 첫 열매”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직 열매와 곡식이 다 익은 것은 아니지만 그 중에서 처음으로 추수하게 되는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날이 맥추절입니다. 대개 처음 거두는 열매가 보리이기 때문에 맥추절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처음 익은 열매를 드린다는 의미에서 “초실절”이라고도 부릅니다. 이 맥추절을 지키라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하시는 배경이 언제, 어디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온 뒤에 시내산에 머물러 있을 때쯤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비롯하여 율법에 대한 말씀들을 받게 됩니다. 아직 이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이전입니다. 이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을 때입니다. 아직 그들이 농사를 하기 이전입니다. 사건이 벌어지기 이전에 하나님은 절기부터 제정을 하셨다는 겁니다. 무슨 뜻일까요? 넌 내가 앞으로 너희에게 베풀 은혜를 믿느냐? 지금 너희 눈에는 아무런 열매가 보이지 않는 것 같지? 아니야. 너희에게 내가 첫 열매를 줄 거야. 완전한 열매도 줄 거야. 그것을 믿느냐? 믿는 자에게 그것이 임할 것이다! 이것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첫 열매를 드리라는 말씀이 구약에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레위기 23:10-11을 보세요.

레위기 23:10-11 ... 너희는, 주가 주는 그 땅으로 들어가, 곡식을 거둘 때에, 너희가 거둔 첫 곡식단을 제사장에게 가져가야 한다 11 그러면 제사장이 그 곡식단을 주 앞에서 흔들어서 바칠 것이며, 주가 너희를 반길 것이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수확하게 될 첫 곡물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겁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기쁘게 받으시는 예물이 되게 하라는 겁니다. 신명기 26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명기는 모세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하신 말씀을 그가 전한 내용입니다.

[신 26:2] 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주시는 땅에서 거둔 모든 농산물의 첫 열매를 광주리에 담아서,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자기의 이름을 두려고 택하신 곳으로 가지고 가십시오.

네가 차지하게 될 그 땅에서 난 모든 소산의 맏물, 첫 열매를 가져다가 광주리에 담아 하나님께 드리라는 겁니다. 왜요? 그 이후 5절에 보면 그들이 애굽에서 소수민족으로 거류하며 나그네 된 삶을 살았었다는 겁니다. 그들이 애굽 사람들에 의해 학대를 당하고 괴롭힘을 당하고 중노동을 하며 종살이를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살려주옵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의 음성을 들으시고 그들의 고통과 압제를 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능력으로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이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해 주셨다는 겁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이 토지의 소산을 거둘 수 있게 되었다라는 겁니다. 그들이 씨를 뿌리고 그들이 물을 주고 가꾸었지만 결국 이 모든 것이 가능케 된 궁극적인 원인은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이미 그들이 그러한 첫 열매를 거둘 것을 아시고 미리 맥추절을 제정하신 겁니다.하나님은 맥추절을 통해 우리의 삶의 열매들의 시작이 하나님이심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은 또한 그 작은 첫 열매가 끝이 아니라 풍성한 열매가 있을 것을 믿으라는 겁니다. 이것이 맥추감사절의 의미에요. 첫 열매를 보는 눈이 열리면 수장절, 즉 모든 것을 다 수확하게 되는 날도 우리들에게 이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첫 열매를 보는 눈이 열리고 그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믿음이 중요한 거예요.

 

맥추절은 첫 열매를 성전에 바친다는 의미에서 ‘초실절’이라고도 불립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가 바로 초실절 아침이었습니다. 그날 아침에 막달라 마리아와 여인들은 어디를 가고 있었을까요? 예수님의 무덤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무엇을 봅니까? 부활의 첫 열매를 봅니다.

[고전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잠든 사람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23 그러나 각각 제 차례대로 그렇게 될 것입니다. 첫째는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요, 그 다음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첫 열매라고 불리는 이유는 그 부활절이 바로 초실절, 즉 첫 열매를 거두는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역과 삶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절기를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때 어린양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초실절에 부활하셨고요, 성령은 초실절로부터 50일이 되는 오순절에 오십니다. 그래서 초실절/맥추절에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첫 열매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면 완전한 열매는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도 예수님의 생명으로 부활하실 것을 믿으십니까? 자신의 부활을 믿는 자들은 첫 열매를 믿는 이들입니다. 그 자들은 첫 열매의 신앙과 감사를 아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성경과 기독교 역사를 보면 믿는 이들이 항상 이 첫 열매를 보는 눈이 열렸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근래에도 첫 열매에 믿음으로 감사하는 이들이 조금씩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 성경은 첫 열매를 보는 눈이 열렸는가 아닌가를 가지고 그 시대의 신앙의 온도를 측정했습니다. 다시 말해 첫 열매 신앙이 사라졌다면 반드시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믿음도 사라졌다는 겁니다. 첫 열매 신앙과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함께 가더라는 것이죠.

 

히스기야가 왕이 되었을 때 유다는 온갖 우상을 숭배하는 나라였습니다. 성읍마다 기둥 석당이 세워져 있었고 아세라 목상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우상을 위한 산당과 제단이 온 나라에 즐비했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가 종교개혁을 일으킵니다. 산당들을 제거하고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회복시키고 조직하고 세웁니다. 임무를 맡깁니다. 예배를 다시 세웁니다. 번제와 화목제가 다시 드려지고 찬양과 감사가 회복됩니다. 그때 무엇을 회복시키냐면 바로 첫 열매 신앙입니다.

 

[대하 31:5, 새번역] 왕이 명령을 내리니, 유다에 와서 사는 이스라엘 자손이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꿀과 각종 농산물의 첫 수확을 넉넉히 가져 왔고, 모든 것의 십일조를 많이 가져 왔다.

놀랍게도 4개월 동안 개혁이 일어났는데 4개월 정도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아사랴 대제사장이 이런 고백을 합니다.

 

[대하 31:10] 사독의 자손인 아사랴 대제사장이 왕에게 대답하였다. "백성이 주님의 성전에 예물을 드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는 먹을 것을 넉넉하게 공급받았을 뿐 아니라, 남은 것이 이렇게 많습니다. 남은 것이 이렇게 많이 쌓인 것은, 주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복을 베푸신 까닭인 줄로 압니다."

물질을 드려서 복을 베푸신 것이 아닙니다. 물질에 그 사람들의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즉 자신들의 삶의 주관자가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공급자이십니다. 그것을 믿고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훗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에 끌려갔다가 다시 유다로 돌아옵니다. 그때 느헤미야와 에스라가 성전 재건을 한 후에 부흥회를 열지요. 그때 그들이 말씀을 들려줍니다. 그들이 회개합니다. 그리고 회복한 것 중에 하나가 무엇이냐면 역시 첫 열매 신앙입니다.

 

[느 13:31] 또 사람들에게 때를 정하여 주어서, 제단에서 쓸 장작과 처음 거둔 소산을 바치게 하였다. "나의 하나님, 나를 기억하여 주시고, 복을 내려 주십시오."

 

첫 열매를 드리는 일은 본래 하나님 백성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이었지만 그들이 잊었습니다.

 

첫 열매도 자신들이 수고하여 얻은 것이라고 착각하였습니다. 자신들의 장자를 살려주신 하나님을 잊었습니다. 그들의 장자를 대신하여 레위인들이 세워졌는데 그들이 성전을 내버리고 나가서 일을 하자 이스라엘의 영적인 방황이 시작되었습니다. 레위인들이 성전을 내버리고 말씀을 제대로 안 가르치니 백성들의 신앙이 점점 약해지고 퇴보하게 됩니다. 이러한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포로로 끌려갔던 이들이 어디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나? 에스라가 말씀을 통해 깨우쳤어요. 그중에 하나가 첫 열매를 보는 눈, 그 믿음이었습니다. 그들이 그것을 깨닫고 다시 첫 열매를 드리기로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비록 작은 첫 열매라 할지라도 이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고 하나님이 그 작은 열매를 풍성한 열매로 완성케 하실 분이라는 그들의 믿음의 고백이 이 맥추감사신앙입니다.

 

히스기야와 에스라 종교개혁 이야기를 뒤집어서 말하면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퇴보에는 언제나 첫 열매 신앙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첫 열매 신앙을 회복할 때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회복되더라는 것이죠.

 

첫 열매를 보는 눈이 열려야만 합니다. 이 눈이 닫히면 다 닫히는 겁니다. 주를 향한 사랑도, 믿음도, 주님이 주시는 복도 다 닫히는 겁니다.

 

처음 열매라고 할 때 처음이라는 말 히브리어 레싯 resit은 beginning 시작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영어로 choicest 고르고 고른 최고의 것, 제일, 으뜸이라는 의미입니다. 첫 열매를 드리라는 것은 가장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는 첫 것과 동시에 가장 좋은 것을 믿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가장 귀한 것으로 여겨주십니다. 잠언 3장 9-10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잠 3:9-10] 9 너의 재산과 땅에서 얻은 모든 첫 열매로 주님을 공경하여라 10 그러면 너의 창고가 가득 차고, 너의 포도주 통에 햇포도주가 넘칠 것이다.

 

여러분, 첫 열매를 보는 눈이 열려야 그 첫 열매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가 온전한 수확을 거두게 하십니다. 작은 것에 감사할 때, 하나님은 더 큰 것에 감사할 수 있는 일을 허락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의 여인에게 말씀하시기를 자신이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인데 그 물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샘물을 NLT 성경에 보니까 bubbling spring이라고 했습니다. 마치 바위에서 솟아나는 샘물 같은 것이지요. 그런데 요한복음 7장에 가서는 그 표현이 바뀝니다. 어떻게요? 생수의 강.

[요 7:38]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이 말한 바와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

샘물과 생수의 강은 차원이 다른 겁니다. 샘물은 아주 소수의 사람들이 마실 수 있는 것이라면, 강은 자연과 동물과 사람 전체를 살립니다. 주님을 믿는 자의 선한 영향력의 차원이 달라진다는 거예요. 그러나 그 첫 시작은 샘물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그 첫 열매와 같은 샘물의 역사를 보고 그것을 하나님께 올려드리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 이후에 우리가 생수의 강의 역사를 경험하도록 하신다는 거예요. 내가 바뀌고 가정이 바뀌고 주위가 바뀐다는 겁니다.

우리가 잘 아는 북이스라엘의 엘리야는 믿음으로 첫 열매를 보는 눈이 있었던 자였습니다.

 

엘리야가 아합 왕 시대에 가뭄을 해결하는 비를 내리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아무리 그가 종을 시켜서 비가 오는지 안 오는지 보라고 해도 아무런 징조가 안보입니다. 엘리야는 시종에게 바다 쪽을 살펴보라고 시켰지요.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갈 때마다 시종이 확인해 보면 아무것도 안보였습니다. 아무런 변화도 없습니다! 낙심이 되지요. 그러나 엘리야가 어떻게 하고 있었습니까? 산꼭대기로 가서 땅을 바라보고 몸을 굽히고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기도합니다. 드디어 일곱 번째가 되었을 때 손바닥만 한 “구름”이 일어났어요. 엄청난 폭풍이 밀려와야 하는데 고작 손바닥만 한 구름이에요. 보통 사람 같았으면 대단히 실망했을 거예요. 사마리아 전체 가뭄을 해결할 비를 주신다고 하나님이 약속하셨는데 고작 사람의 손만 한 작은 구름을 주셨네.. 아 실망이다… 아마 저 같았어도 크게 낙심했을 거예요. 여러분은 어떠셨을 것 같아요? 실망하셨겠죠. 그러나 첫 열매를 보는 눈이 있으면 그 손바닥만 한 구름을 보고 감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손바닥만 한 구름을 보내주셨어! 이제 폭풍이 몰려올 거야!”

 

이민교회에서 목회할 때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었습니다. “우리 남편이 나를 교회에 못 가게 그렇게 괴롭혔는데 이제는 아무 말 안 해” 손바닥만 한 구름이죠. 옆에 있던 분은 “우리 남편은 교회는 안 간다고 하더니 교회 앞까지는 데려다줘” 손바닥만 한 구름이죠. 물론 어떤 날은 그 손바닥만 한 구름이 다시 사라질 때도 있습니다. 그것마저도 안 보여... “우리 남편 다시 술 마시기 시작했어... 도루묵이야..”

 

아닙니다. 엘리야는 비록 손바닥만 한 작은 구름이었지만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으로 선포합니다. 엘리야가 종을 시켜서 아합 왕 더러 "비에 막히지 않도록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시라"고 전하게 합니다. 이것이 그의 믿음이었습니다. 이것이 작은 첫 열매를 보는 믿음입니다. 아주 작은 구름이 무슨 가뭄을 해결하겠습니까? 그러나 아니에요. 열왕기상 18:45에 보니

[왕상 18:45, 새번역] 그러는 동안에 이미 하늘은 짙은 구름으로 캄캄해지고, 바람이 일더니, 곧 큰 비가 퍼붓기 시작하였다. 아합은 곧 병거를 타고 이스르엘로 내려갔다.

그 손바닥만 한 구름이 커져서 하늘을 캄캄하게 덮고 큰 비가 내리는 폭풍이 된 겁니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 인내와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첫 열매를 보는 눈이 열리면 인내합니다. 기다리게 됩니다. 기도하게 됩니다. 감사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예전에 저와 함께 예수동행일기를 나누던 남자 성도님이 흥미로운 제목의 글을 올리신 적이 있습니다.

 

제목이 요나=요(런)나 였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과 동행하고 싶은 마음에 성경읽기도 시작하고, 새벽기도도 나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항상 말씀을 통해 자신의 물음에 답해주셨고 자신에게 당부의 말씀도 해주셔서 너무나 감사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마음들이 삶에 잘 반영되지 않고 같은 죄를 반복하는 자신을 보며 스스로에게 많이 실망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왜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면서도 계속 순종하지 못하는 걸까? 나와 하나님 관계가 잘못된 것일까? 너무 답답한 마음이 들었답니다. 그러다가 그가 요나서를 다시 읽게 되었답니다. 요나는 하나님을 알면서도 불순종하고 반역하지요. 그러나 마지막까지도 하나님이 요나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그의 연약함도 받아주시고, 그가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하셔서 바꾸시는 모습을 그가 보게 됩니다. 이분이 그 요나서를 읽다가 그런 요나가 바로 나라는 생각에 오히려 위안이 되었다는 겁니다. 지금의 내 모습은 이 정도인 “요런 나” “요나”이지만 하나님이 나를 계속해서 바꾸어 가실 것이라는 믿음이 생긴 거예요. 그분을 처음 만났을 때 그저 교회만 왔다 갔다 하던 선데이 크리스천이었는데, 제가 교회를 떠나올 때는 제자를 삼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가정에서는 자녀들의 신앙을 키우는 아버지로, 교회에서는 셀리더요 위원장으로 신실하게 섬기셨습니다. 10년 전 그 손바닥만 한 구름의 신앙이 어느덧 비를 내리는 먹구름으로 자란 것입니다. 그분이 자신 안에 주님 주신 첫 열매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목회할 때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군대 있을 때 사고를 당해서 오른손이 잘렸어요.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한동안 참 낙심이 되고 힘들었다고 합니다. 어릴 적 믿음으로 자랐지만 왜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시나? 그러나 어머니의 기도로 그가 믿음으로 자라게 됩니다. 미국에서 학부를 마치고 취업 인터뷰를 했는데 거의 다 되었다가 막판에 취소가 되었습니다. 이유는 정확히 말 안하지만 장애인인 것이 이유였던 것 같아요. 그가 너무 낙심이 되어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안 될 것 같아요.. 여기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것 같아요..” 제 마음이 참 아팠습니다. 미국에 있든 한국에 있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는 장애가 있어서 안된다는 그 말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함께 기도했습니다. “주님, 이 아들이 믿음으로 자라 여기까지 장애를 딛고 왔는데 이 아들을 지켜주소서.” 함께 기도하고 헤어졌습니다. 그런데 몇 주 지나 다른 곳에서 취업이 되었습니다. 그의 그 사정을 들은 한 사장님이 자신의 회사에서 받아주겠다고 한 거예요. 참 감사하더라고요. 비록 자신의 전공이 아니고 한 손이 없기에 일이 느립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어떤 면에서는 부족한 부분이 많겠지요. 그러나 회사에서 인내해주고 기다려주었어요. 한 달이 지났을 때 교회 재정보고서에서 그 청년이 수천 불을 헌금한 것을 보았습니다. 아니, 돈도 별로 없을 텐데 이렇게 헌금을 많이 했나? 나중에 헌금봉투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첫 직장에서 받은 첫 월급을 첫 열매로 감사함으로 주님께 드립니다. 주님께서 제 길을 인도해 주세요!” 너무나 눈물이 났습니다. 유학생이요 이민자로서 또한 장애인으로서의 설움을 많이 받았을 텐데 믿음 잃어버리지 않고 오히려 첫 열매를 주님께 드리다니. 제가 그 봉투를 붙잡고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주님, 이 아들의 기도를 받아주소서. 이 귀한 첫 열매 믿음을 받아주소서. 평생토록 저의 삶에 부족함이 없이 넉넉하게 채우시고, 저의 삶을 인도하여 주소서. 이 아들을 통해 주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소서.”

 

저도 이 교회에서 처음 드렸던 첫 열매가 생각났습니다. 2004년 1월이었습니다. 그저 불러주시고 써 주신 것이 감사했어요. 미국에 갔을 때에도 학교에서 식당 아르바이트 받은 돈을 첫 열매도 드렸어요. 2011년이었습니다. 부엌에서 일할 수 있음이 감사했기 때문입니다. 이민교회로 부름 받았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첫 담임 목회, 깨어진 교회였지만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회복시키실 줄 믿습니다. 비록 지금은 눈에 아무런 가능성이 보이지 않지만, 믿음으로 회복시키실 줄 믿고 감사합니다. 그것이 2013년 7월이었습니다. 그리고 작년 2021년에도 한국으로 부름 받고 주님께 첫 열매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을 믿음으로 기대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맥추절을 지키라는 말씀이 “시내산 광야”에서 주어졌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어찌 보면 어려운 광야 시기에, 아직 농사도 짓기 전에 하나님은 감사를 명하셨습니다. 왜죠?

하나님에게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없어요. 하나님은 우리 삶에 어떠한 일이 있을지 아십니다.

 

그러니 다가올 일에 대해 믿음으로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 삶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때로는 작은 첫 보리 열매와 같고 바위에서 샘솟는 샘물과 같고, 엘리야가 본 손바닥만 한 구름 같을 때가 있습니다. 어찌 보면 굉장히 실망스러울 수 있어요. 고작 이것 밖에 거두지 못하나? 고작 손바닥만 한 구름인가? 나는 폭풍을 기대했는데. 그러나 아닙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할 마음도 있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한꺼번에 다 주시면 참 좋겠지만 하나님은 하나씩 주십니다. 첫 열매를 주시고 우리가 감사할 때, 그 다음을 주시고, 또 그 다음을 주십니다. 그 하나하나에 우리가 감사하게 하십니다. 그 첫 열매가 비록 작고 적어보여도, 하나님이 일을 시작하셨으니 풍성한 열매를 거두어 수장절의 열매, 온전한 열매를 거두게 하실 것입니다.

오늘 맥추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우리가 잊고 있었던 첫 열매의 신앙, 첫 열매를 보는 눈을 회복하십시다. 우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확신합니다! 그 믿음으로 승리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맥추감사절 설교 - 첫 열매를 보는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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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추감사절 설교 :; 감사함의 기적(요 6:8-14)

 

 

<서론>
작년도(08년) 한국인의 고소․고발은 70만 건입니다. 일본은 2만2천 건으로, 무려 일본의 44배입니다. 인구비율로 보면 120배입니다. 그야말로 고소공화국, 불평공화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통령의 자살 사건을 놓고 서로 공격하며 고발하며 비난합니다. 한 쪽은 정권이 죽였다, 검찰이 죽였다, 언론이 죽였다… 하고 다른 쪽에서는 왜 정권이 죽였냐, 돈을 준 측근들이 죽였고 돈을 받은 가족들이 죽인 것이다… 라고 맞받아칩니다. 

 

국민소득 3만불 시대이다, 세계경제국 몇 위(位)라 해도 국민수준이 아직 멀었습니다. 허구한 날 남을 헐뜯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고소하고 고발하는 민족이 어떻게 선진국이 될 수 있습니까? 그중에서도 3분의 1은 무고(無告)로 끝난다니, 얼마나 우리 민족이 잘못된 잘못된 민족성으로 나가고 있습니까? 국민 정신개혁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이 일을 누가 감당해야 합니까? 기독교?

 

종교는 그 시대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한국교회는 교단마다 교회마다 세상법정에 고소․고발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감리교는 총회 감독자리를 놓고 서로를 법정에 고발해 놓은 상태이며 우리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교단만 해도 세상 법정에, 교단 재판국에 올라가 있는 고소․고발건들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습니다. 교회가 이러니 세상을 위해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위해 뭐라고 하면 “너나 잘 하세요!”라는 반응이 돌아오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런 시대에 맥추감사절을 맞습니다. 맥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봄 농사를 거두고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절입니다. 맥추절은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출 23:16)는 말씀에서 유래합니다. 밀과 보리를 거두어들인 후 지키는 맥추절은 유월절 후 일곱 주간(49일)이 지나 지킨다고 해서 “칠칠절”(출 34:22), 49일이 지나 50일째 지킨다고 해서 “오순절”이라고도 합니다. 유대인들은 여기에 덧붙여 모세가 율법을 받은 날이라고 하여 겸겸 감사의 절기를 지냈습니다.

 

추수감사절과 마찬가지로 맥추절도 그 중심은 “감사”입니다. 감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혈관을 돌고 있는 피와 같습니다. 피가 잘 돌면 건강한 사람이고 피가 제대로 돌지 않으면 사지(四肢)가 마비되고 피가 굳어지면 죽은 사람이 됩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감사가 없으면 행복한 믿음이 아닙니다. 종은 소리가 좋아야…다. 장작불은 불이 활활 타올라야…과일은 당도(糖度)가 좋아야… 소리가 고와야… 합니다. 크다고 새로 나왔다고 좋은 제품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감사지수-그것이 우리 믿음을 잴 수 있는 바로 미터입니다.

 

오늘은 2023년도 전반기를 결산하고 후반기를 맞는 첫 주일입니다. 내가 명품(名品) 크리스천이 될 수 있을까? 불량품 크리스천으로 살아갈 것인가? 자신을 점검해 보는 카센터 정비 날입니다. 오늘은 감사의 달인이신 예수님의 감사를 보며 한 수 배우도록 합시다.

 

1. 예수님의 감사는 빈들의 감사입니다.

본문은 벳새다들에서 일어났던 이적입니다. 벳새다는 갈릴리 호수로 흘러드는 요단강의 북동쪽에 있었던 큰 어촌(漁村)으로 베드로와 안드레, 빌립의 고향입니다.

감사는 어떤 환경에서 하는가? 번영하고 건강하고 좋은 대학에 입학하고 취직, 결혼하고… 금년 6개월 동안에도 감사할 내용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런 감사는 50점짜리 감사입니다. 이런 조건부 감사가 많다고 감사의 달인이다,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런 감사 중심이라면 감사할 수 없는 여러 조건들이 생겨납니다. 그때 우리는 감사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성경적 감사는 아무 것도 감사할 수 없는 상황 가운데서 하는 감사입니다. 마가복음 6:35에는 “빈들”이라고 말합니다. 빈들은 아무 것도 없는 곳입니다. 소출도 없고 감사할 것이 별로 없는 곳입니다. 감사의 조건은 찾아볼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늘 이 빈들에서 “축사”(11절)하셨습니다. 축사는 감사입니다. 여기에 몰려든 사람들은 불평으로 가득 찬 사람들입니다. 왜냐? 먹고 살만한 사람들은 없습니다. 먹고살만한 사람들이라면 뭐가 아쉽다고 이곳에 와 있겠습니까? 가난하고 원통하고 소외당하고… 그래서 100% 불평하고 공격하고 원망할 모든 조건을 다 갖춘 암하레츠-빈민계층의 사람들입니다. 요즘 우리말로 말하면 노조를 만들어 정부를 공격하고 대항할 빈민계층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인생살이 자체가 아무 것도 없는 빈들과 같은 형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적을 먼저 보인 것이 아닙니다.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그냥 먹이는 이적을 보인 것이 아닙니다. 그 분은 그 작은 것을 들고 먼저 감사의 기도를 합니다. 본을 보이신 것입니다.

 

빈들이라는 상황 때문에 기도할 수 없는 사람들, 감사할 수 없는 사람들-세상을 향해 불평하고 원망하고 고소 고발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빈들에서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는 것, 이웃들에게 감사할 수 있는 것, 이것이 이적이자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감사의 기적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고전적인 감사는 “없는 데서의 감사”입니다. “빈들에서의 감사”입니다. 하박국은 빈들과 같은 상황에서 마음을 추스르며 이렇게 외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 3:17~18)

 

여기에는 “못하며” “없으며”가 반복해서 6회가 나옵니다. 없다는 것은 빈들입니다. 우리는 풍성한 포도원을 위해서는 노래할 수 있습니다. 엄청난 수확을 갖다 주는 과수원으로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못하다, 없다… 쉽게 감사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진정한 감사는 빈들과 같은 환경에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윗은 “구원의 즐거움”(시 51:12)이라고 합니다. 구원의 즐거움이 있으면 빈들에서도 감사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의 즐거움을 감사의 최고조건으로 삼지 않고 채워진 환경으로만 감사할 조건을 찾는다면 늘 부족하고 불평하는 생활이 될 수 없습니다. 같은 환경이라도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갖느냐에 따라 감사도 되고 불평도 됩니다.

 

어제 친구목사 집안의 결혼예식이 있어 분당 할렐루야교회에 갔었습니다. 지난번 이 집사님 따님 결혼식 갈 때는 차가 꽉 막혀 버스전용차선으로 가는데 신났습니다. 할렐루야! 감사했는데 어제는 감사하지 못했습니다. 옆의 차선도 뻥! 뚫렸기 때문입니다. 이거 될 일입니까? 남들이 뻥! 뚫려도 감사해야 되는데 감사가 없으니… 이게 조건부 감사의 한계입니다.

 

우리는 풍성한 환경 가운데서는 감사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 것도 없는 빈들에서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감사의 달인입니다. 감사절의 진정한 의미는 여기에 있습니다.

 

2. 예수님의 감사는 작은 것에 대한 감사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다보니 저녁이 되었습니다. 한 2만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을 먹여야 하는데 소년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전부입니다. 너무 작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보리떡 다섯 개를 들고 축사-감사하셨습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남자들만 오천 명을 먹고도 12광주리로 남는 축복을 가져왔습니다. 작은 것에 대한 감사는 뻥튀기 축복을 가져왔습니다.

 

예수님과 당시 사람들은 감사가 달랐습니다. 그들도 감사의 사람입니다. 유월절에 해방의 기쁨을 인해 감사했습니다. 초실절-첫 열매에 대해 감사했습니다. 일 년의 수확을 마무리하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유대인으로 출생한 것에 대해 감사했습니다. 종교적인 것, 큰 것에 대해서는 감사를 잘했습니다. 그러나 작은 것에 대해서는 감사하지 못했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감사 조건이 아닙니다. 감사하기에는 너무 작고 보잘것없습니다. 질적으로 감사할 내용이 아닙니다. 마른 보리떡은 별로 먹고 싶은 음식이 아닙니다. 할 수 없이 먹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보리떡이 있다고 감사하고 먹을 음식은 아닙니다.

 

숫자적인 면에서도 감사할 내용은 아닙니다. 2만 명이 넘는 군중들이 모여 있는데 다섯 개와 2마리로 무엇을 하겠어요? 그래서 아무도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시큰둥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작은 것, 보잘것없는 것을 들고 축사-감사기도 하셨습니다. 그럴 때에 떼어줘도, 떼어줘도 계속 불어나며 2만 명을 먹이는 엄청난 분량으로 늘어났습니다.

 

그 보리떡과 마른 고기가 단순히 딱딱하고 맛대가리가 없는 떡과 마른고기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제껏 먹어보지 못한 가장 맛있고 신기한 맛을 내는 독특한 떡과 고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일생에 평생 잊지 못할 떡이었을 것입니다. 질과 수효에서 엄청난 역사를 일으킨 것입니다. 그들은 떡을 먹으며 조상들이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결국 작은 것, 보잘것없는 것을 두고서도 감사하는 예수님의 감사는 광야에서 40년을 먹였던 하나님의 축복을 다시 가져왔으며 그들의 마음속에 풍성히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기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누가 기적을 체험할 수 있습니까? 작은 것에 대해 감사하며 보잘것없는 것에 대해서도 감사를 하는 사람들이 감사를 통해 기적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너무 큰 것으로만 감사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보리떡과 같은 작은 것들이 우리 주변에 있을 것입니다. 그것 같고 감사하십시오! 남들 보기에는 형편없는 것, 그것 놓고 감사를 하면 그것이 우리를 살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며 보여줄 수 있는 큰 능력으로 나타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미국 자동차 재벌 헨리 포드에게 조지아 주(州)의 마르다 베리라는 초등학교 여선생의 편지 한 통이 배달되었습니다. 아이들을 위해 피아노 한 대를 놓고 싶은데 1천 달러를 기증해 줄 수 없겠냐는 것입니다. 포드는 일상적인 일이므로 10센트(130원꼴)를 보냈습니다. 얼마나 실망스러운 일입니까? 그러나 마르다 베리는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10센트로 땅콩 종자를 구입했습니다. 아이들과 땅콩 농사를 시작했습니다. 가을이 왔을 때 잘 익은 땅콩을 수확해서 감사의 편지와 함께 포드에게 보냈습니다. 포드가 여기에 감동을 받아 1천 달러가 아니라 1만 달러를 보냈습니다. 1천 달러의 만 불의 1인 10센트를 받고도 감사했을 때 10센트의 10만 배를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감사의 기적입니다.

 

작은 것에 대한 감사-그것은 큰 축복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씨앗이 됩니다. 그래서 스펄젼목사는 “촛불을 놓고 감사하면 전깃불을 주시고 전깃불에 감사하면 달빛을 주시고 달빛에 감사하면 햇빛을 주시고 햇빛에 감사하면 천국의 영원한 빛을 주신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작은 것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보리떡 다섯 개-작은 것입니다. 다윗의 손에 들려있는 물맷돌-작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12제자-작은 것입니다. 그 작은 것들이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작은 것에 대해 감사하면 하나님께서는 큰 것에 대해 감사할 내용을 주시고 작은 것을 감사하지 못하면 큰 것에 대한 감사도 없음을 본문은 보여줍니다.

 

요즘 자살자들이 속출합니다. 우리 동네만 해도 쉬쉬하면서 제가 들은 자살자들만 여러 명입니다. 자살자들은 대부분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입니다. 왜 우울증에 걸립니까? 먹고 사는 것이 힘들면 우울증에 걸리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감사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감사가 없는 사람들은 쓸데없는 비교의식을 합니다. 자기가 받은 것은 생각하지 않고 받지 못한 것만 생각합니다. 작은 것에 대해서 감사하면 우울증이 생길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남과 비교하지 마십시오! 자신과 자신을 비교하십시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비교하십시오! 얼마나 많이 발전했습니까? 과거보다 오늘의 내가 못하다면 오늘의 나와 미래의 나를 비교하십시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작은 내가 주님에게 쓰임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유월절은 큰 감사의 절기입니다. 수장절 역시 큰 감사절입니다. 맥추절은 아무래도 감사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수확이 작다고 해서 감사가 적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초실절은 수장절을 전제로 감사합니다. 그래서 작은 것에 대해 크게 감사하는 것, 이것이 바로 맥추절이 주는 교훈이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감사의 교훈인 것입니다.

 

3. 예수님의 감사는 사람에 대한 감사입니다.

여기 2만 명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계산적인 사람들입니다. 빌립은 당장 주판알을 튕겼습니다. 7절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2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겠습니다.” 2백 명 인부의 돈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묻는, 일을 시키는 주님의 의도를, 마음을 몰라주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남을 배려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 많은 사람 중에 소년만이 보리떡과 물고기 를 갖고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자신의 것을 내놓지 않으려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루 종일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주옥같은 말씀을 들었지만 설교는 들었지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말씀의 은혜는 받았지만 자기의 것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내놓을 생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이용해서 왕을 세우고 뭔가를 얻으려는 이기적인 사람들입니다(15절). 결국 예수님과 말씀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얼마나 예수님을 낙심시키며 힘들게 하는 다수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보고 이적을 보이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 가운데 예수님께서 주목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안드레 같은 사람, 어린 소년 같은 사람-그들은 비판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대안을 찾아 애쓰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것을 아끼지 않고 내놓으려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소수였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보며 감사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인의 감사입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을 보면 안 됩니다. 나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나를 사랑하고 내가 잘 되기를 바라고 내 주변에서 아론과 훌처럼 나를 위해 중보사역을 하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음에 대해 감사를 해야 합니다. 그러면 감사를 통해 이적이 일어납니다. 공급의 축복, 배불리게 하는 축복, 12광주리로 남는 넉넉한 기적을 볼 수 있습니다. 감사를 통한 기적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결론>
저는 지난 몇 년 동안 하루 열 가지 씩 감사를 해왔습니다. 감사를 하면 기쁨이 생기고 행복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어느 날부터 10개의 감사가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음을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유가 뭘까? 감사를 하면서 불평도 함께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제가 하는 불평이라야 얼마나 불평하겠습니까? 세상 돌아가는 모습에서,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일이 잘 안 되었을 때… 때로는 교회에서 인간관계로… 

그래서 불평을 끊지 않으면 감사를 하루에 1백번 외쳐대어도 공허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지금은 감사는 계속하되 불평 제로의 삶을 만들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9월에 있을 “불평 없는 세상 만들기” 프로그램입니다. 

 

탈무드는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배우는 사람이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감사하는 사람이다”라고 말합니다.

 

<행복론>의 저자 칼 힐티(“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의 저자) “감사하라 그러면 젊어진다.… 감사하라 그러면 발전이 있다… 감사하라 그러면 기쁨이 있다”라고 말합니다.

 

감사함으로 더 크게 이적을 체험할 수 있는 교우 여러분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감사에 1등을 하는 성도님 여러분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감사 경기는 누구나 1등을 할 수 있는 경기입니다. 모두들 금메달을 따시고 더욱 행복한 삶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맥추감사절 설교 - 감사함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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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추감사절 설교문 다운로드

첫 열매에 대한 감사의 설교문입니다. 맥추감사절 설교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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