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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절 설교 10개 모음 :: 부르짖은 자의 감사, 감사가 부르는 축복

일하는 목회자 발행일 : 2023-11-06

은혜로운 추수감사절 설교 10개를 공유합니다. 설교 안에 추수감사절 예화가 풍부하게 있으니 부분적으로 참고하시면서 작성하시면 좋은 설교를 준비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설교문 한글파일(hwp)을 다운로드를 받아보실 수 있도록 각 설교문 아래에 다운로드 링크를 올려놓았습니다. 추수감사절 설교문 원고가 필요하신 분께서는 설교문 아래에 있는 버튼을 눌러서 다운로드 받아주세요.

 

추수감사절 설교문-1 :: 부르짖은 자의 감사

추수감사절 설교 제목: 부르짖은 자의 감사

추수감사절 설교 말씀: 시편 107:1-9

 

서론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한 해에 두 번 추수감사절을 지켰습니다. 첫 열매를 딸 때와 마지막 열매를 저장할 때 추수감사절을 지켰습니다. 오늘 우리는 도시에 살고 있기 때문에, 사실 추수감사절의 진정한 의미를 제대로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오늘 지난 1년을 기억하며, 또 지난 1년간 함께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우리는 추수감사주일 예배를 드립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여러분께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감사하십니까? 진심으로 감사하고 계십니까?

 

감사의 조건을 이야기할 때, 보통 평안을 누리거나 아무런 걱정이 없을 때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고백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아무런 병이 없어서 감사하고, 다른 이보다 가난하지 않아서 감사하고, 좋은 가정을 주셔서 감사하고, 똑똑한 아이를 주셔서 감사하고, 좋은 직장을 주셔서 감사하고, 좋은 동료와 이웃을 주셔서 감사하고, 좋은 부모님을 주셔서 감사하고, 이런저런 일들로 감사를 표현합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이런 조건들로만 감사를 표한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모든 조건을 채우고 있을지 돌아봅니다. 이 모든 감사 제목으로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는 사람을 찾으라면, 아마 손에 꼽을 정도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자주 하곤 합니다.

 

“무엇이 감사합니까?”라고 물으면 피상적인 답변이 들려옵니다. “좋은 가정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건강을 허락하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이런저런 대답을 합니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 정말 감사가 있나?’라는 질문을 던져봅니다. 또 다른 여러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혹시 우리도 이런 기도를 드리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게 됩니다. “하나님, 다른 이보다 가난하지 않아서 감사합니다. 적절한 재물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면서도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보다 부자인 사람이 많던데요?’

 

“좋은 가정, 좋은 배우자를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하며 감사를 표현하면서도, 속으로는 ‘저보다 행복한 가정이 많던데요? 그런데 이 정도로 만족해야 되겠지요? 그리고 저 옆집 여자는 무슨 복이 많아서 저렇게 좋은 남편을 만났습니까?’라며 가슴 깊이 묻어둔 본심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똑똑하고 잘생긴 아이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누가 물어보면 이렇게 감사의 제목을 올리지만, 속으로는 이렇게 말하지요. ‘그러면 뭐해요. 좋은 학교 못 들어가면 꽝인데…. 우리 아이, 최고 학교에 들어가게 해 주세요. 안 그러면 사회에서 뒤처질 거예요.’ 이런 이야기들이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는 것은 아닌지요? 그러니 다시 한 번 묻게 됩니다. 과연 우리는 정말 감사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감사의 예배를 온 마음을 다해 드리고 있습니까?

 

본문 해석

감사 시편 107편에는 네 사람의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오늘 본문은 시편 107편입니다. 107편에는 매우 중요한 사람들의 이야기 4편이 실려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감사 선언으로 시작을 알립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들은 이같이 말할지어다 (시편 107:1~2 중)

 

‘여호와께 감사하라’는 선언으로 시작되는 이 시편은 이어 네 종류의 사람들의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구체적인 사연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첫번째 사람: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광야에 있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거할 성읍을 찾을 수도 없습니다. 길을 찾지도 못합니다. 방향을 잡을 수도 없습니다. 어디가 길인지, 어디로 가야 할지, 어느 지점으로 가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습니다. 그 광야의 길, 사막의 길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결국 목이 마릅니다. 모든 기력이 빠졌습니다. 그의 영혼은 피곤하며 곤핍합니다. 그때, 그가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습니다. “나를 도와주십시오.”라고 절규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음의 지경에서 건져 주십니다. 바른길로 들어서게 하시고, 사람들이 사는 마을, 그가 거할만한 장소에 이르게 하십니다. 이것이 첫 번째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2) 두번째 사람:

이어 두 번째 사람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그의 발목에는 쇠사슬이 채워져 있습니다. 아픔을 참고 어두컴컴한 곳에 갇혀 있는 사람입니다. 그의 마음은 고생의 질곡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가 쓰러져도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는 홀로 갇혔습니다. 외롭습니다. 일으켜 줄 사람도 없습니다. 그때, 그가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습니다. 도와달라는 울부짖음이었습니다. 외로움에 지친 하소연이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죽음의 지경에서 그를 건져 주십니다. 그를 묶고 있던 사슬을 끊어 주시고, 어둡고 캄캄한 곳에서 그를 나오게 하십니다. 쇠 빗장을 부러뜨리시고 놋 대문을 부서뜨리십니다.

 

(3) 세번째 사람:

세 번째 사람의 이야기도 이어집니다. 스스로를 방탕한 곳에 두었던 사람입니다. 쾌락을 찾던 사람입니다. 죄악에 거하다 그만 큰 병에 걸려 죽을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입맛도 떨어졌습니다. 먹는 것조차 지겨워졌습니다. 거의 죽음의 문턱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때, 그가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강한 영혼의 절규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의 부르짖음을 들으셨습니다. 말씀 한마디로 그를 고쳐 주시고 죽음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세 번째 사람의 이야기도 마무리됩니다.

 

(4) 네번째 사람:

네 번째 사람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그는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대양을 헤치며 고기를 잡아 장사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큰 바다에 돌풍이 입니다. 물결이 치솟기 시작합니다. 그 배는 큰 바다에 나뭇잎만도 못한 존재가 됩니다. 큰 물결에 휩쓸려 조그만 배가 하늘 높이 올랐다 다시 바다 깊숙이 빠지곤 합니다. 정신이 없습니다. ‘이제 죽었구나.’ 생각하곤 넋을 잃었습니다. 배는 술 취한 듯 비틀거리고 있습니다. 언제 침몰할지 모르는 위급한 상황입니다. 그때, 그가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고통 속에서 그를 건져 내십니다. 광풍과 물결을 잠재우심으로, 죽음의 지경에서 그를 구원해 내십니다. 사방이 고요해졌고, 평온한 바다로 변화됩니다. 이내 그는 기뻐하며 바라던 항구에 도착합니다.

 

< 부르짖는 자에게 시인은 감사와 찬송을 올릴 것을 선포합니다. >

 

시편 107편은 네 사람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시편 107:31)

 

“감사하라.” 그리고 “찬송하라.”라는 말씀으로 마무리됩니다. 우리는 어떨 때 감사합니까? 어떤 사람이 감사를 드립니까? 어떤 모습이 진정한 감사의 모습입니까?

 

시편 107편을 읽다 보면, 참 묘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본문에 나오는 네 사람은 도저히 감사할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감사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한마디로, 모두가 고통과 고난에 처한 사람들입니다. 모두 한결같이 어려움에 처한 사람입니다. 한 사람은 광야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기진하던 사람입니다. 향방을 잃은 사람입니다. 한 사람은 어둡고 캄캄한 곳에 갇혔던 사람입니다. 감옥에 갇혔습니다. 외로움에 갇혔던 사람입니다. 또 한 사람은 죽음의 문턱에 이르도록 병에 걸려 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었다면 살아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 한 사람은 배를 타고 가다 풍랑에 빠진 사람입니다. 이중 어느 누가 하나님께 감사할 만한 조건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시편 107편은 감사할 조건이 없에 보이는 네 사람의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서두에서부터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선포를 앞세웁니다.

 

동시에 이처럼 감사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표현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의 환란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라는 구절입니다. 본문에서 이 말씀이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6절은 이렇습니다. “이에 그들이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시107:6) 그는 광야에서 헤매던 사람입니다. 길을 찾지 못하고, 먹을 것을 얻지 못하고, 기진해 목말라하며 향방을 잃은 사람입니다. 이어 감옥에 갇힌 사람도 여호와께 부르짖었음을 성경은 증언합니다. 13절입니다. “이에 그들이 그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시107:13) 병에 걸렸던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19절 말씀입니다.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시107:19) 마지막으로 풍랑 속에 있던 자도 똑같습니다. 28절입니다.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시107:28)

 

1. 하나님은 부르짖는 자의 기도를 들어 응답하십니다.

(예화) 어느 목사님이 겪으신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다급한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교회 집사님이신데, 소아과 의사인 분이셨습니다. 초등학생인 조카가 뇌수막염에 걸려 죽게 되었다는 전화였습니다. 자신이 소아과 의사라 잘 알고 있는데, 상당히 안 좋은 상태라고 했습니다. 다른 종교를 믿고 있는 시누이와 무종교인 오빠의 아들이었습니다. 다급한 마음으로 조카를 살리고 싶어 저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입니다. 의사 선생님의 전화였습니다. 조카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 달라고 간절히 부탁했습니다.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처음 보는 어머니와 아버지, 아이의 누나가 절망감 가운데 불안하게 서성이고 있었습니다. 한 분은 종교가 다르고, 또 한 분은 종교가 없는 분이었지만, 저를 보자마자 기도해 달라고 요청하셨습니다. 제가 진심으로 마음을 다해 기도하는데, 제 마음속에 지혜로운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응답과도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기도를 마친 후 아이의 부모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머니, 다른 종교를 믿고 계신다고 했지요? 하나님 한번 믿어 보시겠습니까?” 그러자 그분이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지금 그래도 됩니까? 염치없이 그래도 될까요?”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셔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그리고 어머니가 간절하게 드리는 기도를 하나님께서 물리치지 않으실 것입니다.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그곳을 떠났습니다.

 

며칠이 지났습니다. 의사인 고모가 그 아이를 살피고 있었지만, 워낙 의사 선생님들이 비관적이라고 했기에 큰 기대는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죽지만 않으면 좋겠다.’라는 게 그분들의 첫 번째 기도 제목이었습니다. ‘살기는 하되 불구가 되어도 좋다.’라는 게 그분들의 기도 제목이었습니다. 계속해서 기도했고, 아이의 어머니는 열심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간구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상황이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아이가 병을 잘 이겨내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습니다. 게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가 나을 것 같다는 이야기도 들려왔습니다. 이후엔 후유증도 없을 것 같다는 이야기도 들려왔습니다. 결국 아이는 많은 시간이 흘러 건강하게 퇴원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완전히 건강해져서 군대까지 다녀왔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날 이후 그 가족은 모두 교회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그의 어머니가, 아이의 누나가 수능시험을 보던 날 있었던 일을 교회 인터넷 카페 게시판에 올린 글을 제가 보게 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우리 아이가 수능시험 날 아침에 자기 책상에 앉아 기도드리는 모습을 보니, 참 감격스럽더군요. 엄마이지만 신앙의 시작은 같은 시점이니까요. 우리 가족은 서로 변해 가는 모습에서 서로 격려 받고 있습니다. 교회를 통해 하나님 사랑을 알게 되고, 내 능력으로 어쩔 수 없을 때마다 언제나 힘이 되어 주시는 주님을 확인하게 됩니다. 기도해 주시는 교우님들, 목사님, 전도사님, 감사합니다.”

 

저는 그 글을 읽으면서 무언가 가슴이 뜨거워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기뻐하실까? 얼마나 좋으실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때, 그렇게 기도하던 누나는 지금 목사의 사모가 되었습니다. 물론 아직도 갈 길이 멀지만, 하나님의 오묘한 손길을 그들의 삶을 통해 느끼고 있습니다.

 

2.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자가 감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누가 정말 감사할 수 있을까요? 누가 감사한 사람입니까? 부자 아버지가 있어서 돈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사람이 감사할 수 있을까요? 부자라고 감사할 수 있습니까? 좋은 이력을 가지고 있다고 감사할까요? 좋은 이력을 가지고 나이들 때까지 모든 것을 누리는 사람이 감사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감사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요?

 

오늘 여러분께 묻고 싶습니다. 이 자리에서 정말 가장 감사한 사람이 있다면 누구일까요? 여러분일까요? 아니면 또 다른 어떤 사람일까요? 진정한 감사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 부르짖은 사람’입니다. 부르짖어본 사람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느끼고 주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 본 사람만이 하나님께 진정한 감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은 사람은 감사할 수 없습니다. 부르짖지 않은 사람은 감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는지 아닌지조차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저 누리겠지요. 그러나 간절히 기도한 사람은 내게 허락된 것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압니다. 간절히 부르짖어 본 사람만이 자기 삶에 주어진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간절히 기도해 본 사람이 오늘 이 시간에도 가장 감사할 것입니다.

 

한편 오늘 본문에 흥미로운 말씀이 있습니다.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 말씀은 25절에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명령하신즉 광풍이 일어나 바다 물결을 일으키는도다 (시편 107:25)

 

참 이상한 말씀입니다. 107편은 전반적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라’ 하는 내용으로 구성됩니다. 그리고 네 가지 사례도 알려줍니다. 광야에 있던 사람, 감옥에 갇혔던 사람, 병이 들었던 사람, 풍랑 속에 있던 사람. 그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자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셨다는 내용으로 이어집니다. 이렇게만 이어져도 될 것 같은데, 그 중간에 이해할 수 없는 본문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명령하신즉 광풍이 일어나 바다 물결을 일으키는도다 (시편 107:25)

 

풍랑의 근원이 하나님에게서 왔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과연 하나님께 정말 감사를 드릴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바다에서 열심히 고기를 잡고 있었는데, 하나님이 오셔서 큰 물결을 만드시고 어려움을 만들어 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하나님께 부르짖자 하나님께서 물결을 잠잠하게 해 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감사하라고요? 이것이 과연 맞는 이야기입니까?

 

우리를 골탕 먹이시는 하나님? 짓궂으신 하나님? 이렇게 이해되지 않습니까? 우리는 종종 어려움을 만날 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나를 광야로 몰고 가신 분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왜 내게 그 길을 잃도록 만드신 것입니까? 왜 나를 병마에 사로잡히도록 하신 것입니까? 내가 감옥에 갇히도록 놔두신 분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이 아닙니까?” 우리는 때때로 이렇게 하나님을 원망하며, 그와 같은 말씀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 말씀이 굳이 시편 107편에 나타나는가?’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얼마든지 빼놓아도 보기 좋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광풍을 명령하셨다는 말을 빼도 이야기의 흐름은 아주 잘 이어집니다.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이 훨씬 더 잘, 더 많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광풍을 일으키셨다’라는 구절을 삽입해야 합니까?

 

주석학자들에 의하면, 시편 107편은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된 사건을 기념하며 부른 감사의 노래라고 합니다. 바벨론으로 잡혀갔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오랜 기간 바벨론에서 끊임없이 하나님께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도는 응답 되지 않는 듯 보였습니다. 이스라엘을 포로로 보내신 분이 누구셨습니까?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하나님께서 베푸는 해방의 순간에 고향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돌아오면서 부른 노래가 바로 시편 107편입니다. 포로의 긴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는 길에 부른 감사의 노래입니다.

 

그들의 바벨론에서의 포로 생활은 마치 광야에서 길을 잃었던 시간과 같았습니다. 또 갇혀 있던 시간과도 같았습니다. 외로운 시간이었습니다. 마치 병에 걸려 죽을 위기에 처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들이 바벨론 포로로 사로잡혀 있던 시간은 풍랑을 마주한 배의 경험과도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로 그와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라. 하나님께 감사하라.”라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때는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먼 시간이 흐른 후,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시간을 경험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표합니다. 감옥에 있던 시간이 감사하고, 포로의 시간이 감사하며, 병에 걸렸던 시간조차 감사하고, 풍랑 속에 있던 시간도 감사하다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주님께 드린 기도를 주님께서 응답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긴 시간이 흐른 후에야 하나님의 역사를 다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누가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까? 온전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 수 있을 때, 긴 안목을 가지고 있을 때, 진정으로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와 섭리를 바라볼 때 감사할 수 있습니다.

신명기 8장 2~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명기 8:2~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 경험을 하게 하신 이유는, 그들을 주리고 배고프게 하심으로 그들이 진정 먹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깨닫게 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와 역사를 바라볼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감사할 수 있습니다. 순간만 바라본다면 결코 감사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포로 생활을 했으나 눈앞의 현실만 바라보지 않고, 먼 미래의 모든 것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의도를 분명하게 알게 될 때,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1장 6절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브리서 11:6)

 

하나님은 우리에게 상 주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찾는 자에게 상 주기를 원하시며 기다리고 계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우리가 병에 걸렸을 때라도, 감옥에 갇혀 있을 때라도, 광야를 헤매고 있을 때라도, 폭풍과 풍랑 속에 정신을 잃고 있을 때조차도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보시며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우리에게 상 주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를 이끌어 가시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좋은 것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마지막은 해피엔딩입니다.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의도를 안다면, 우리는 풍랑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정말 감사합니까? 감사하지 않았다면, 기도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주님 앞에서 정말 애절하게 기도하지 못한 우리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오늘이 되기를 바랍니다. 울부짖고 부르짖음으로 감사를 성취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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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절 설교문-2 :: 감사가 부르는 축복

추수감사절 설교 제목: 감사가 부르는 축복

추수감사절 말씀 본문: 예레미야 30:18~22

 

(서론) 오늘 추수감사절입니다. ‘감사’는 ‘사랑’과 함께 기독교의 브랜드입니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보내어 구원하실 만큼 나를 ‘이빠이’ 사랑하시고, 나는 사랑의 하나님께 ‘이빠이’ 감사드리고… 얼마나 좋아요! 두 단어만 실천하며 살아도 우리 인생이 풍성하며 ‘성도’님이 됩니다! 사랑과 감사의 두 단어를 갖고 살면서도 행복하지 못하면 그게 기적입니다!

 

본문은 예레미야가 백성들에게 외친 말씀입니다. 예레미야는 남방유다 말기에 사역한 선지자입니다. 이미 유다는 망하기로 작정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에 열을 올리고 가나안 원주민들과 어울려 세속화되고 죄는 만연되어 말기증상을 보인 것이지요.

 

이런 백성들에게 예레미야는 죄의 실상을 보여주면서도 희망적인 대안을 제시합니다.

 

19절, “그들에게서 감사하는 소리가 나오고 즐거워하는 자들의 소리가 나오리라…”

 

그 이하는, 감사하게 되면… 감사목소리에 따라오는 축복을 말합니다.

 

1. 감사목소리는 잘됨을 불러옵니다.

19절, “…내가 그들을 번성하게 하리니 그들의 수가 줄어들지 아니하겠고 내가 그들을 존귀하게 하리니 그들은 비천하여지지 아니하리라”

 

한마디로 잘 된다는 것입니다. 감사목소리에 이스라엘은 번성하고, 감사목소리에 인구는 늘고 감사목소리에 존귀하게 되고 감사목소리에 비천해지지 않으니라…. 감사가 불러오는 축복입니다. 황소의 고삐를 잡고 있으면 황소는 저절로 따라옵니다. 감사목소리는 축복의 고삐입니다. 감사를 잡고 있으면 축복은 저절로 따라옵니다. 이게 축복의 원리입니다.

 

이스라엘은 선택된 선민입니다. 세상에 복이 들어오는 근원, 혈통으로 선택됩니다. 참 복은 구원입니다. 죄로 죽을 세상에서 영생으로 구원 받는 복! 예수님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가 세상에 들어올 혈통으로 유대인을 택했습니다. 얼마나 감사해요? 대통령가문으로 누군가를 택하고, 대통령 나오는 고등학교로 어느 지방학교를 택했다면 얼마나 큰 영광이자 자랑입니까?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으로 들어오는 혈통으로 삼았으니 얼마나 큰 축복의 민족입니까?

 

선민의 또 다른 축복은 제사장 축복입니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백성을 연결해줍니다. 양자 간을 중보해서 죄가 해결함 받고 백성들이 기도에 응답받아 풍성하고 축복받는 삶을 살게 하니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남도 잘 되게 하고 나도 잘 되니 이것이 잘 되는 복입니다.

 

문제는 선민으로 선택되어도 감사목소리가 되지 않고 감사심장이 되지 않으면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감사가 없는 세상민족들에게 질렸습니다. 불평만 늘어놓는 사람들을 수단으로 축복을 전달할 수가 없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속성에 위배됩니다.

 

그래서 선민은 축복을 위해 선택받은 백성들이자 감사가 묻어야할 사람들입니다. 유대인에게 3대절기가 있는데 정초에 있는 유월절은 구원에 대한 감사, 봄에 있는 오순절, 초실절은 땅의 언약이 이루어짐에 대한 감사, 가을에 있는 수장절 추수감사절은 한 해를 지켜주심에 대한 감사… 감사로 1년의 사이클이 계속 돌아갑니다. 감사체질로 만들려 하신 것입니다.

 

요나는 고기뱃속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렸더니 구원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나이다.”

 

요나는 3일을 고기 뱃속에서 살았습니다. 슈퍼히어로 슈퍼맨, 스파이더맨, 원더우먼입니다. 그 힘이 감사목소리입니다. 감사목소리를 내니 고기뱃속에서 사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축복을 만들고 싶은가요? 감사하세요! 축복의 통로가 되고 싶은가요? 간단해요! 감사하면 축복의 통로로 살게 될 줄로 믿습니다! 감사하면 사방이 우겨 싸임을 당해도 살아납니다.

 

2. 감사목소리는 회복을 불러옵니다.

이스라엘은 감사의 샘입니다. 구세주의 혈통 선민이 되고, 여호와종교를 유통시킬 제사장 신분이니 얼마나 큰 감사입니까? 감사의 저수지가 출렁댈 때 가장 하나님의 백성다웠습니다. 이스라엘은 다윗 때에 가장 번성했는데 감사가 풍년 드니 모든 게 풍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세월이 지나면서 감사 씨가 말라버렸습니다. 감사 씨는 먹지 말고 남겨두고 계속 싹을 틔우고 번성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감사 씨를 불평이 먹어버린 것입니다. 걸핏하면 불평입니다. 물이 많으면 많다고 홍해 앞에서 불평… 만나와 메추라기라는 최고의 영양가 음식을 40년이나 주었으면 감사해야 하는데 코에서 냄새가 난다고 불평… 감사를 통해 축복의 통로가 되라고 했더니 불평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망한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말합니다. 이제 너희들에게 감사소리가 나오고… 감사목소리에 무엇이 따라올까요? 요나는 고기뱃속에서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했더니 고기가 토해내서 밖으로 나오게 되고 삶이 회복되고 사명이 회복됩니다.

 

예레미야도 감사목소리에 회복이 따라온다고 합니다.

 

20절 “그의 자손은 예전과 같겠고…” 예전…. 얼마나 좋았어요?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태평성대를 이루었습니다. 사방으로 국토가 넓혀졌고 조공이 줄을 이었고 가나안 원주민들은 머슴이었습니다. 지상천국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목소리가 마르면서 점점 쇠했습니다. 선민 자존감은 낮아졌고 압박당하고 지금은 멸망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국가의 위기, 국가의 회복을 놀랍게도 감사에 둡니다. 국가를 회복하는 것은 군대도 경제력도 아니라 감사라는 것입니다. 그들에게서 감사하는 소리가 나오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때는 감사부터 회복시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걸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망하게 하실 때는 불평부터 시작하고 잘되고 회복시킬 때는 감사로 시작합니다. 감사가 축복을 끌어오고 즐거움을 끌어당깁니다. 감사 목소리는 풍랑에서도 살고 감사하면 큰 고기도 삼킬 수 없어 토해냅니다. 인생에 찾아온 불행이 감사하는 사람을 삼킬 수 없어 토해낸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불평은 풍랑을 불러오고 불평의 목소리를 따라 망하게 하는 불평어뢰가 따라붙습니다. 그러면 꽝! 끝장입니다.

 

(예화) 남편이 회사에서 돌아오면 아내에게 불평만 늘어놓습니다. “내가 열 받아. 못 해 먹겠어.” 불평만 하다 주유소에 취직했습니다. 종일 기름만 넣다 와서 아내에게 불평합니다. “누구는 종일 서서 기름을 넣어주고 누구는 앉아 기름만 받으니 기분 나빠 못해먹겠다!” 이번에는 공동묘지 관리인으로 취직했습니다. 사람들 꼴도 보기 싫고 서 있는 것도 싫으니 사람 얼굴 볼 일 없고 종일 편안하게 앉아 있는 일을 찾은 것입니다. 아내가 “이제는 할 만해요?” 물었더니, 글쎄, 이러더랍니다. “더러워서 못해먹겠어. 누구는 종일 앉아만 있고, 누구는 종일 누워 손 하나 까딱 안 해.”

 

요나는 감사목소리로 회복되었습니다. 사명이 회복되고 크게 일을 했습니다. 예레미야도 감사목소리에 회복이 임한다고 합니다. 믿음이 회복되고 자원하는 심정이 회복되고 믿음의 첫사랑이 회복되기를 원하십니까? 감사목소리를 만들어 내세요! 회복이 따라옵니다! 감사어뢰가 불평어뢰를 막아내고 축복의 생애를 살 수 있습니다.

 

3. 감사목소리는 치료를 불러옵니다.

17절,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쫓겨난 자라 하매 시온을 찾는 자가 없은즉 내가 너의 상처로부터 새 살이 돋아나게 하여 너를 고쳐 주리라”

 

17절은 선택된 본문보다 앞서 있지만 감사가 있는 누구에게나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3일 동안 요나가 고기뱃속에 있으면 고기내장 독(毒)이 올라 거의 죽음 직전입니다.

 

그런데 고기가 요나를 토해냈고 큰 성 니느웨를 활보할 만큼 신체가 강인해졌습니다. 감사할 때 상처로부터 새살이 돋아난 것입니다. 새살만 아니라 용기가 돋아난 것입니다. 사명감이 돋아난 것입니다. 감사가 불러온 치유와 회복입니다. 인생은 하나님의 손에 있지만 축복과 불행은 내가 초대합니다. 어떤 목소리에 하나님께서 치유하시겠어요? 감사목소리입니다. 어떤 목소리에 불행이 따라오겠어요? 불평목소리입니다.

 

감사에는 여러 차원이 있습니다. 비교우위 감사. 내가 가진 것이 누구보다 더 많고 내가 누구보다 좀 더 낫다고 느낄 때 갖는 감사입니다. 상대적 감사. 일종의 조건부 감사합니다. 좋은 일이 있으면 감사, 그렇지 않으면 툴툴툴~ 불평…. 감사와 불평이 한 입에서 들락날락합니다. 가장 높은 차원의 감사는 ‘절대적 감사’입니다. 범사에 감사, 체질화된 감사입니다.

 

우리 교인들 장점이 뭔가? 교회에서 세상 신분과 명예를 드러내려 하지 않아요. 김 장로님 대기업 사장으로 있을 때 직원이 1500명 넘어요! 내색하지 않아요! 5,6명 놓고 성경 가르칩니다.

 

경찰치안감 최 집사님, 군대로 말하면 별 2개 소장입니다. 10만 안팎의 경찰 중에 24명 중의 한 분입니다. 대단하잖아요? 종로경찰서장이 우리교회에 왔다고 생각해봐요. 절절 맬 겁니다. 그래도 집사님 내색하지 않아요! 또 다른 김 집사님, 직원이 수십 명인데도 얼마나 교회에서 떠들고 소박합니까? 박 집사님 전국 정치평론가입니다. 교회에서 그냥 수수해요!

 

정 집사님 은행지점장일 때도 누구하고도 어울려 배드민턴 치고 동네 아저씨로 믿음생활을 합니다. 오 집사님 전국 1,2위 안경원 싸모님(?)입니다. 거명하려면 계속됩니다. 그분들이 하나같이 표를 내지 않아요. 나는 이게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교인들이 내 설교에 코드가 맞아요! 좋은 청중을 가진 설교자처럼 행복한 목사가 어디 있겠어요? 그러니 감사가 체질화될 수밖에 없지요. 상대적 감사는 내가 누리고 있는 은혜 축복 감사의 조건들을 몰라서 그래요! 감사조건이 많은 사람들이 불평하더라고요!

 

(예화) 영화 <잠수종과 나비>는 2007년도 칸영화제 최우수감독상을 받은 작품입니다. 주인공 장 도미니크 보비는 프랑스 패션잡지 <엘르> 편집장으로 준수한 외모와 화술로 프랑스 사교계를 풍미합니다. 그러다 자동차 사고로 머리가 다쳐 쓰러집니다. 43세 보비가 할 수 있는 것은 왼쪽 눈의 깜박임 뿐. 15개월 동안 20만 번 이상의 깜박임을 통해 130쪽 분량의 책을 완성했습니다. 영화 제목이 된 <잠수종과 나비>라는 책입니다. 보비는 서문에서 말합니다.

 

“흘러내리는 침을 삼킬 수만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50센티미터 거리에 있는 아들을 보고서도 따뜻하게 안아줄 수 없어 눈물을 쏟은 안타까운 심정, 건강의 복을 모른 채 툴툴거리면서 일어났던 수많은 아침들에 대해 죄스러운 마음을 후회한다고 고백합니다.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절대적 감사를 할 수 있는 아이러니! 그러니 감사는 무엇에 대한 감사, 무엇 때문에 오는 감사가 아니라 범사에 감사하는 체질화된 감사가 진짜 감사고 이런 목소리가 감사할 수많은 조건들을 데리고 온다는 것입니다.

 

요나는 고기뱃속에서 감사목소리를 냈습니다. 요나가 감사목소리를 낼 때 새 역사가 시작됩니다. 감사가 회복되니 살길이 생기고 인생이 회복되고 사명이 회복되더라는 것입니다.

 

(예화) 스탠포드대학의 재료과학 교수 윌리엄 틸러 박사는“사람들이 사랑과 감사의 감정에 집중할 때 심장박동은 질서정연하고 일관성 있는 완전한 싸인 곡선이 된다.”고 말합니다. 부정적인 감정-분노, 불안감, 슬픔, 근심을 느낄 때 심장박동이 불규칙하게 뛰고 그러면 많ㅇㄴ 병들이 발생합니다. 긍정적인 감정들-감사, 기쁨, 사랑으로 정상적인 심장박동이 유지되면 있던 병도 없어지고 건강하고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그 명령을 그대로 행할 때 우리 몸은 창조된 그대로 반응하게 됩니다. 그러니 감사가 최고보약입니다. 산삼(山蔘) 해삼(海蔘), 10년 묵은 삼(蔘)보다 더 좋은 것이 천삼(天蔘) 감사입니다.

 

우리나라의 가장 큰 위기는 안보도, 경제도, 도덕적 타락도 아닙니다. 감사실종이 위기입니다. 예수님처럼 억울한 일을 당한 것도 아니고 바울 같은 고난을 당한 사람도 많지 않는데 왜 그렇게 분노와 미움과 불평으로 채워져 있습니까? 불평은 내가 나를 가장 나쁘게 만드는 요소입니다. 불평목소리에는 불만과 불안이 딸려옵니다. 감사로 고리를 끊어야 합니다.

 

결론

2차 세계대전 이야기 <가장 긴 밤>을 집필한 코넬리어스 라이언은 5년간 암(癌)으로 투병하다 죽었습니다. 암의 고통에도 죽는 날까지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아내가 물었습니다.

 

“여보! 죽어가는 고통에도 무엇이 감사하여 매일 감사하다고 기도해요?”

 

라이언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하루를 맞을 때마다 5가지 감사가 솟아나. 첫째로 사랑하는 당신을 볼 수 있는 날에 감사해. 가족의 음성을 다시 들을 수 있음에 감사해. 병들어 눕기 전에 원고를 탈고한 것이 그렇게 감사해. 병마와 싸울 수 있는 힘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 주님이 늘 나의 곁에 계시다는 것이 그렇게 감사해.”

 

이게 절대적 감사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대하셨던 민족은 바로 비교 우의적 감사도 아니고 상대적인 조건부감사도 아니고 22절,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되시고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가 되시고 나는 그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사실 앞에 감사하는 바로 그런 민족을 기대하셔서 선민을 만드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실패했다면 우리가 그 몫을 대신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안 되면 나라도 감사의 목소리를 높입시다! 감사절에 감사온도를‘이빠이’ 올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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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절 설교문-3 :: 예수님의 감사

제목: 예수님의 감사

말씀: 마태복음 14:13~21

 

(서론) 어릴 때 청결 검사라는 게 있었습니다. 항상 청결하게 살아야 했는데 하도 목욕을 않고 단정치 못하니까 이런 제도를 통해서라도 학생들이 건강하게 자라기를 원했던 선생님들의 배려였습니다.

 

감사절 설교를 준비하면서 감사절을 지키는 것도 결국 청결 검사와 같은 맥락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영적으로, 우리의 믿음생활이 건강합니다. 아이들이 항상 깨끗해야 건강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감사를 드리지 못하고 살아가니 하나님은 한국교회에 두 가지 감사절을 주셨습니다.

 

맥추감사절과 추수감사절입니다. 두 절기야말로 감사를 회복시켜주는 계기가 됩니다. 감사절이 헌금봉투를 돌리는 교회의 제도가 아니라 바로 우리를 영적으로 건강하게 만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청결 검사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1. 예수님은 빈들에서 감사했습니다.

본문에 "축사하시고"(19절) 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축사"(祝謝)는 바로 감사의 다른 표현입니다. 유대인들은 음식을 먹을 때마다 간단한 식사기도를 드렸습니다.

 

"땅에서 이용할 양식을 주시는 우주의 왕,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당신에게 기쁨이 되소서"

 

예수님도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것은 감사의 기도였습니다. 먹을 것을 주심에 대한 감사입니다. 예수님께서 축사하시던 환경은 사실 감사할만한 조건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빈들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텅 빈곳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만물이 그분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그에게 만물은 너무 초라합니다. 오곡백화로 가득 차 있어야 할 넓은 들판은 텅 비어있습니다. 아무리 사방을 둘러보아도 감사할만한 분위기가, 감사할 만한 건덕지가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풀 한 포기 없는 곳에 그래도 먹을 것이 눈에 보이고, 손에 먹을 것이 들려있으니 감사하는 것입니다. 만물을 주신 하나님만을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빈들에서도 작은 것을 주시는 빈들의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풍요로운 밭을 보면서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풍성한 수확 앞에서는 감사하지만 초라한 현실 앞에서는 원망과 불평이 나옵니다.

 

금년은 유달리 불경기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업을 하시는 분들에게는 견디기 힘든 한 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감사가 생명입니다. 우리는 풍성한 오곡백과를 보면서만 감사할 것이 아니라 빈들의 하나님, 텅 빈속에 움켜쥐고 있는 그 몇 푼을 보면서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추수감사절의 기원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에게로부터 수장절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고 그대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현대의 추수감사절은 미국의 청교도들로부터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영국국교회의 박해를 피하여 신대륙으로 떠났습니다. 63일 간의 모진 역경 끝에 그들은 새로운 땅에 들어가 농사를 지었습니다. 마음씨 좋은 인디언 추장을 만나 옥수수 씨앗을 얻어 농사를 지었고 가을에 수확을 했습니다. 그것을 감사하며 하나님께 감사제를 올린 것이 바로 현대적 추수감사절의 유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환경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옥수수 열매 몇 개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자유를 주신 하나님, 굶기지 않고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들은 저 빈들에서 잠시 눈을 들어 여호와를 바라봅시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을지라도…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분, 우리에게 여러 은택을 주신 분을 향해 감사의 정성을 올립시다.

 

빈들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감사의 사람들이 됩시다. 빈손을 들고서라도 감사할 수 있는 감사의 대장들이 됩시다. 우리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2. 예수님은 작은 양식 앞에서 감사했습니다.

예수님은 벳새다 들녘에서 오랜 시간을 천국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느라 날이 어두워 버렸습니다. 저녁 시간은 되었는데 먹을 것을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스승에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마을에 내려가서 먹을 것을 사먹게 하소서"

 

그러나 빈들은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기에 빈속으로 돌아가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무엇이든 먹이고 싶었습니다.

 

"사람들 가운데 먹을 것이 있나 찾아봐라"

 

제자들이 이곳저곳을 찾다보니 마침 어린 아이 하나가 먹을 것을 갖고 있었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 그것은 너무도 초라한 양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숫자는 너무도 많았습니다. 예수님 혼자의 양식이 되기에도 모자랄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초라한 양식을 보며 하나님 앞에서 섭섭한 감정을 드러낼 수도 있었습니다. 쓸쓸한 웃음을 지을 수도 있었습니다.

 

광야 40여 년을 생활할 때에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셨던 하나님, 여러 사람들 앞에 그런 이적을 보이시면 예수님의 명성은 하루아침에 퍼져나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이적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형편없는 사실 앞에서도 그분은 축사, 감사하셨습니다.

 

감사는 많은 양을 갖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정성이 문제입니다. 헌금을 하는 것을 보면 돈이 많다고 해서 많이 하는 것도 아니고 돈이 없다고 해서 작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마음의 정성이 고스란히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그렇습니다. 넉넉하고 많은 것을 받았다고 해서 많이 감사하는 것은 아닙니다. 남편이 갖다 주는 수백 만 원을 받으면서도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턱없이 모자라는 생활비를 받으면서도 감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 이런 감사자들을 좋아하십니다.

 

어느 개척교회 전도사가 결혼을 하고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렸습니다. 개척교회 전도사에게 시집오겠다는 여자가 있어 감사하고 주일학교 교사가 있어 감사하다는 기도입니다.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금년 한 해 우리가 얻은 것이 너무 작습니까? 너무 많이 얻어터졌습니까?

 

권투에 "잽"이라는 게 있습니다. 그러나 수없이 잽을 얻어맞다가도 한 방 날리기만 하면 승리는 우리의 것이 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수없이 많은 잽을 먹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감사할 때 하나님은 그분에게 한방 날리게 하셨습니다. 오천 명을 먹일 만큼 엄청난 것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축사하시는 예수님, 작은 것을 갖고 감사하는 마음에 크게 축복해 주셨습니다.

 

비버리 스미스, 아픔을 감지 못하는 특수한 체질을 갖고 태어났습니다. 머리를 부딪쳐도 아픈 줄을 모르고 울 줄을 모릅니다. 그는 배고플 때 화가 날 때만 웁니다.

 

이런 것을 보면 아픔을 느끼는 것도 감사의 조건입니다. 작은 것 갖고도 감사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예수님은 한 사람 때문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빈들에는 수많은 사람들로 채워져 북적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먹을 것을 찾으셨을 때 주님을 위해 먹을 것을 내놓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먹을 것이 없었을까요? 아니면 아껴두었다가 자기만 먹으려고 했을까요?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 데 먹을 것이 소년이 내놓은 그것 이라고는 볼 수가 없습니다. 더 많은 것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내놓으면 자기만 배고프리라는 생각에 전대 깊숙이 찔러 놓았을 것입니다.

 

어른들의 이기심, 어른들의 계산… 이런 저런 것들을 생각하면 화가 날만도 합니다.

 

제자들 역시 그만한 생각들이 없었을까요?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주님을 위해 먹을 것 하나 챙겨두지 않았는지… 생각할수록 분통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수많은 사람들보다 한 사람의 정성 앞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먹을 것을 감추고 있는 사람들만 보면 화가 납니다. 전대 속에 들어있는 것들을 생각하면 분통이 터집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예수님께서 찾으신 것입니다.

 

너도나도 예수님께 드리려고 앞 다투어 내어놓아야 하는 데 감춰두고 시침을 떼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까지 말씀을 받아먹은 자들이 보여주어야 할 태도란 말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이 순간 다른 사람들은 보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그 얌체 같은 모습은 보지 않고 오직 한 사람, 한 소년의 정성을 보며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럴 때에 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신대륙의 청교도들. 상륙지의 조건은 너무 나빠 1년에 반수에 해당하는 44 명이 폐병으로 죽었습니다. 노동력을 가진 남자들이 죽었습니다. 살아남은 자들은 모두 어린이들, 노약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남아있는 사람들을 보며 감사했습니다.

 

금년도 다 끝나고 있습니다. 11월이 되면 단풍이 들고 하나씩 낙엽이 되어 떨어진다는 것은 자연의 신비입니다. 우리는 자연의 섭리를 보면서 기울어져 가는 한 해를 생각하고 반성을 하게됩니다. 지나간 세월 동안도 우리들은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이 우리 모두에게 어떤 면으로든 영향을 미쳤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할수록 너무 고통을 남겨준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들은 더 좋은 이들을 생각하십시오. 나에게 해를 끼치고 떠나간 자들이 아니라 도움을 주고 사랑을 주었던 이들을 생각합시다. 그래야 우리들에게 감사할 만한 조건들이 수없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결론

이제 우리들은 감사의 용의검사장에 들어왔습니다. 우리 자신들을 성찰해봅시다. 감사의 마음이 합격했습니까? 이제 감사를 회복하는 시간들을 가집시다. 하나님에게 대한 감사, 가족들에게 대한 감사, 교회에 대한 감사합시다!

 

ㄱ. 빈들에서 감사하십시오.

ㄴ. 작은 것에 대해 감사하십시오.

ㄷ. 한 사람을 위해 감사하십시오,

 

여러 사람들이 나를 화나게 했어도 나를 행복하게 해 준 그 한 사람, 그 한순간 때문에라도 이 시간 감사를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우리들은 예수님의 제자도를 좇아갈 수 있고 풍성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에게 감사절을 주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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